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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어떤 영화의 첫 시사회. 관객들이 소스라치며 뛰쳐나갔고, 한 관객은 영화 때문에 유산이 됐다며 제작사를 고소했다. 감독은 곧장 비난에 휩싸였다. 얼마 가지 않아 헐리우드에서 사라졌다. 주조연 배우 일부도 캐스팅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영국에선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영화'라는 이유로 32년간 상영 금지됐다. 현재에도 미국 일부 지역에선 상영할 수 없다. 1960년대 반문화와 청년문화의 물결 속에서 하위 주체들의 저항을 다룬 작품으로 인용되며 잠깐 빛을 봤지만, 9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논쟁 속에 휩싸여 있다.1932년 토드 브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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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이 사라지고 있다. 전국에서 100억 마리의 꿀벌이 감쪽같이 실종됐다.2010년 감염병으로 토종벌 60% 이상이 폐사한 후 12년만에 다시 꿀벌이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 전국 양봉 농가들은 텅 빈 벌통 앞에서 망연자실했고 언론과 전문가들이 요란스레 온갖 가설들을 제출한다. 말벌, 살충제, 응애, 이상 기온, 장마 등 온갖 범인들이 지목됐지만, 단일 원인이 아니라 복합적 요소가 뒤섞여 있다는 두루뭉술한 진단이 대체적이다.2006년 꿀벌이 돌아오지 않는 '군집 붕괴 현상'이 처음 보고됐을 때도 그랬다. 원인을 특정하지 못하고 미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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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화제가 된 동영상. 검정색 외투를 입은 한 우크라이나 노파가 총으로 무장한 러시아의 젊은 군인에게 여기에서 뭐하고 있냐고 따져 묻는 순간을 담고 있었다. 군인이 머뭇거리자 이렇게 말했다."주머니에 해바라기 씨를 넣어둬라. 그러면 니가 죽은 뒤 우크라이나에서 해바라기가 자랄 것이다."머리털이 쭈뼛 섰다. 할머니의 그 말이 순식간에 기억 속을 관통하더니, 유년에 봤던 영화의 오프닝 장면을 자동으로 재생시켰다. 우크라이나 국기처럼, 파란 하늘 아래 대평원의 노오란 해바라기들이 바람에 흔들리던 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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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초, 평화시장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 마치 동굴 속을 더듬듯, 비좁은 계단을 한참 올라가 마주한 허름한 노조 사무실. 촬영 허가를 구하기 위해 간 거였다. 당시 단편영화 연출팀 막내였었는데, 노동운동을 했던 감독이 그 낡은 평화시장 건물에서 촬영하고 싶어했다. 노동자의 비애를 다룬 라는 35mm 단편영화. 장소 협조를 구하는 우리의 말을 경청하던 중년의 상근자가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문 닫는 건 아시죠?”촬영이 끝난 후,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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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영화는 그 존재 자체가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곤 한다. 1990년 한국에선 상영을 저지하기 위해 대학가 상공에 경찰 헬기가 떴다면, 1953년 미국 뉴멕시코주에서는 촬영을 막기 위해 소형 비행기가 세트장 위를 수시로 활강했다. 극우 자경단은 아예 세트장에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정부와 경찰과 자경단으로부터 동시다발적으로 탄압 받은 미국 영화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1954)이 그 주인공.매카시 시대, 반공주의 광풍에 영화인들이 투옥되고 아침마다 일자리를 잃었다. 블랙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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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0일, 짧은 동영상 한 편이 전세계에 타전됐다. 뉴욕주 버팔로의 한 스타벅스 매장의 노조 설립 찬반 투표 결과가 막 발표되고 있었다. 숨을 멈추고 있던 스타벅스 직원들이 결과가 발표되자 소리를 지르며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미국 스타벅스 5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노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그 동영상을 내 SNS 계정에 올리며 이렇게 첨언했다. “장담하건데, 이 장면은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만큼 명치께가 저릿했다. 그런데, 그 영상 속 장면과 똑닮은 영화가 이미 존재한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노조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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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안 낳으려고요. 못 할 짓 같아요.” 얼마 전, 같이 작업하는 스텝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그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고 했다. 가뜩이나 불평등으로 얼룩진 세계인데, 기후와 환경까지 망가진 곳에 어떻게 아이를 낳겠냐는 것.하기야 ‘기후 출산파업’ 운동이 등장하는 시대다. 세계 지도자들이 기후위기 해법을 제시하지 않으면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캠페인. 또 세계 곳곳의 여론조사에서도 기후위기가 출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대답이 쏟아지고 있다. 출산 행위 자체가 죄의식이 되는 기이한 세계.아마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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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2015년 던킨도너츠 인천공장이 위생 문제로 폐업돼 일자리를 잃은 경험이 있다.”지난 10월 5일, 제보자가 전면에 등장했다. 던킨도너츠 공장의 위생 문제를 세상에 알린 후, 회사 측과 보수언론이 ‘영상이 조작됐다’라는 기사들을 일제히 융단폭격하듯 유포하던 시점이었다. 회사 측은 제보자 신원 공개와 무기한 출근정지 처분으로 보복에 나섰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이 ‘민노총’ 소속원의 소행이라는 프레임을 양산하고 있던 터였다. 평소 노동운동을 달가워하지 않은 대중들도 그럴 줄 알았다며 신나게 혐오의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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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 성공’. 지난 7월, 아이슬란드에서의 주4일 근무제 실험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는 전 세계 언론의 요란한 호외를 접한 후, 기민하게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가 이오셀리아니의 걸작 이다.이 영화는 러닝타임 10분이 지나도록 거의 대사가 없다. 월요일 아침, 귀청을 때리는 세 개의 괘종시계 알람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는데, 주인공인 중년의 용접 노동자가 공장에 출근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퇴근하는 일상을 건조하게 나열한다. 그런데 다음 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루틴으로 출근을 하던 주인공이 공장 앞에서 냅다 도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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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38세의 알제리 청년이 성난 군중들에게 방화범으로 몰려 집단 린치를 당하고 불에 태워졌다. 단지 이 청년은 산불을 끄고 지역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던 것뿐인데, 최악의 산불 재난으로 점화된 대중의 광기와 폭력이 한 인간의 선량함을 집어삼킨 것이다. 앞서 터키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8월 1일 안탈리아의 성난 농부들이 칼을 들고 몰려가 쿠르드 노동자들을 마을에서 내쫓았다. 산불 용의자로 의심된다는 거였다. 8월 5일 터키 아이딘 지역에서는 100여 명의 시민들이 도로를 점건한 채 쿠르드족 운전자들을 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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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홍석천의 커밍아웃은 한국 성소수자 가시성의 역사에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대중들에게 성소수자의 실존을 널리 알린 신호탄.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모임이 결성되고, 민주노동당과 문화연대를 비롯한 진보진영이 연대를 표명했다. 그런데 연대 요청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주노총, 언론노련, 방송사 노조 등 노동단체들은 뜨뜻미지근했다. 뜻밖의 반응이었다.커밍아웃 직후, 홍석천은 MBC ‘뽀뽀뽀’와 KBS 라디오 시트콤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된 터였다. 다른 출연 건들도 모두 취소됐다. 명백히 성정체성이 해고 사유인 첫번째 사건. 지지 모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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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의대생과 평택항 청년 노동자.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두 죽음을 대하는 세상의 다른 온도가 왠지 석연찮았다. 한 달 전쯤, 페이스북에 사람들이 왜 한강 의대생 죽음에만 관심을 갖는지 의구심을 토로했다. 그러자 답글 하나가 달렸다. 한강 사건에는 거대한 미스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미스터리라.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강 사건은 언론의 과도한 의제 설정과 음모론에 기댄 유튜브 방송들의 난립으로 부풀려진 말풍선이 아니던가. 반면에 평택항 사건은 피해자는 있는데 관리 책임자들 모두가 결백을 주장하는 기이한 사건이었다.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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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전국이 들썩였다.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언론들은 앞다퉈 호외를 날렸고, 사방 도처에서 축하 메세지들이 축포처럼 쏟아졌다. 충분히 축하할 만한 일. 윤여정의 쾌거는 분명 하나의 사건이었다. 청와대도 서둘러 축전을 보내며 이렇게 영화 감상평을 덧붙였다.“가족의 이민사를 인류 보편의 삶으로 일궈냈고, 사는 곳이 달라도 모두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을 확인해줬다.”영화 가 재현한 한국인의 미국 이민사는 ‘인류 보편의 삶’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공교롭게 바로 전날인 4월 25일에도 일군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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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 노모의 택배가 도착했다. 머위, 쑥, 미나리, 냉이, 수삼 등 바리바리 싸서 보냈다. 상자를 열자마자 봄 냄새가 와락 달려든다. 침샘이 맹렬히 흘렀지만, 한편으론 속이 상했다.보내지 마시라 한사코 만류한 터였다. 이걸 서울로 보내려면 여든에 가까운 노친네가 손수레로 20kg 무게의 상자를 끌며 높은 언덕을 오르내리고, 2킬로 남짓 떨어진 읍내의 농협까지 가야 한다.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무겁다면서도 기어이 보낸 거였다.예전엔 전화만 하면 우체국 직원이 달려와 냉큼 가져갔다. 직접 연락하라며 개인번호도 줬다는 살가운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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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화감독은 “관객에게 답을 주는 영화는 극장에서 끝나지만, 관객에게 질문을 주는 영화는 상영이 끝나야 시작된다”고 했답니다. 영화는 우리의 삶을 비추기도 하고 우리가 바라고 싶은 세계를 그리기도 합니다. 영화 속의 이야기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들, 그리고 영화가 그리는 세계의 이야기들을 천천히 살펴보며 우리의 노동과, 세계를 이야기를 이송희일 감독의 에서 나누고자 합니다.이송희일 감독은 1997년 를 시작으로20여년 간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대표작으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