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3.01.06 15:41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한 장애 여성이 낄낄거리며 버스 정류장에 낙서를 한다. Piss on Pity. 동정심에 오줌을 갈겨라. 90년대 초중반 영국 장애운동사를 대표적으로 수식한 슬로건인 동시에, BBC2 TV영화 의 핵심을 짚는 중요한 키워드다. 젊은 장애인 커플의 러브스토리와 영국 장애운동사를 엮어낸 이 작품은 올해 초부터 넷플릭스에서 전 세계에 스트리밍되고 있다. 영화 오프닝의 패기에 걸맞게, 기존의 장애인 영화들이 흔히 답습해온 연민의 시선이나 표피적인 피해자성과 단호히 결별하고 장애인의 복잡다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2.12.07 18:16
김진표 국회의장에게 강력하게 추천하는 미드 한 편이 있다.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2.11.07 13:32
가슴을 쓸어내렸다. 봉화 광산에서 두 명의 광산 노동자가 생환했다는 소식에 시민들 모두 반색했다. 221시간 만에 어둔 갱도 끝에서 광부들이 마주한 그 생의 빛은 연이은 참사로 시름에 잠긴 시민들에게도 한 줄기 위로였을 터다. 커피믹스와 떨어지는 물, 숙련노동자의 지혜, 그리고 서로의 어깨의 온도가 버팀의 동력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먼빛으로 들려오는 발파 소리. 자신들을 구하러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그 발파 소리가 희망의 동아줄이었다고 밝혔다. 짐짓 그 발파 소리는 국가와 사회가 두 사람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약속의 시그널이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2.10.06 10:17
1988년 12월 22일, 브라질 아크레 지역의 작은 도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당시 44살이던 치코 멘데스는 샤워를 하러 뒷마당으로 가다 산탄총을 맞고 고꾸라졌다. ‘아마존의 간디’라는 애칭을 가진 남자의 피가 뒷마당 진창을 적셨다. 며칠 후 그의 장례식에서 젊은 룰라(브라질 전 대통령)가 관 앞에서 비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나는 치코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이 나라 전체의 신앙고백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 진보정당, 노동조합 운동의 약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치코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브라질 노동계급 해방의 시작입니다.”아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2.09.05 17:27
"소위 '정치적 올바름'의 시대에 멸종된 줄 알았던 미국적인 미국영화를 만났다."여기에서 가장 미국적인 영화란 을 말한다. 모 지면에 실린 영화 칼럼의 한 문장. 또 어느 평론가는 '최근 블록버스터들이 앞다투어 유행처럼 다루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이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찬했다. 칼럼 지면뿐 아니라, 국내 개봉 후 관객의 상당수는 각종 커뮤니티와 SNS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얼룩이 묻지 않았다며 기이할 정도로 열광적 환호를 보냈다. 나무위키의 이 문장은 환호의 절정을 이룬다."억지로 정치적 올바름을 넣는 것이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2.08.08 10:01
호주 헌터스 힐의 덤불숲(Kelly's Bush)은 백인 정착지 옆에 딸린 미개간지였다. 주머니쥐와 토종 조류가 서식하고, 오래된 원주민 건물들이 자리하는 숲. 지역 시의원들은 진드기 투성이의 쓰레기장이라며 허투로 취급했다. 그러다 1971년 시 당국이 이곳에 고층 아파트를 짓겠다고 발표했다.인근에 살던 전업주부들이 개발에 반대했다. 부자들의 고층 아파트를 짓느라 풍요로운 공유지를 파괴해선 안 된다는 거였다. 그들은 유력 정치인들과 언론사에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장은 '13명의 피의 주부들'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낙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2.07.05 13:33
1974년에 제작된 로만 폴란스키의 필름 누아르 . 영화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나리오 중 한 편으로 손꼽히는 걸작이지만, 한편으론 50여년을 앞질러 기후위기 시대의 풍경을 정확히 예시해주고 있다. 좋은 영화는 시간을 관통한다.은 오일쇼크와 환경 위기 담론으로 점철된 70년대의 자장 안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로마 클럽의 를 비롯한 생태와 기후위기 담론이 매스미디어에조차 격렬히 개진되던 때. 영리하게도 필름 누아르와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빌려, 자본주의가 어떻게 환경과 공유재의 권리를 사유화하며 도시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2.05.09 12:51
어떤 영화의 첫 시사회. 관객들이 소스라치며 뛰쳐나갔고, 한 관객은 영화 때문에 유산이 됐다며 제작사를 고소했다. 감독은 곧장 비난에 휩싸였다. 얼마 가지 않아 헐리우드에서 사라졌다. 주조연 배우 일부도 캐스팅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영국에선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영화'라는 이유로 32년간 상영 금지됐다. 현재에도 미국 일부 지역에선 상영할 수 없다. 1960년대 반문화와 청년문화의 물결 속에서 하위 주체들의 저항을 다룬 작품으로 인용되며 잠깐 빛을 봤지만, 9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논쟁 속에 휩싸여 있다.1932년 토드 브라우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2.04.07 17:32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 전국에서 100억 마리의 꿀벌이 감쪽같이 실종됐다.2010년 감염병으로 토종벌 60% 이상이 폐사한 후 12년만에 다시 꿀벌이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 전국 양봉 농가들은 텅 빈 벌통 앞에서 망연자실했고 언론과 전문가들이 요란스레 온갖 가설들을 제출한다. 말벌, 살충제, 응애, 이상 기온, 장마 등 온갖 범인들이 지목됐지만, 단일 원인이 아니라 복합적 요소가 뒤섞여 있다는 두루뭉술한 진단이 대체적이다.2006년 꿀벌이 돌아오지 않는 '군집 붕괴 현상'이 처음 보고됐을 때도 그랬다. 원인을 특정하지 못하고 미스터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2.03.07 10:11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화제가 된 동영상. 검정색 외투를 입은 한 우크라이나 노파가 총으로 무장한 러시아의 젊은 군인에게 여기에서 뭐하고 있냐고 따져 묻는 순간을 담고 있었다. 군인이 머뭇거리자 이렇게 말했다."주머니에 해바라기 씨를 넣어둬라. 그러면 니가 죽은 뒤 우크라이나에서 해바라기가 자랄 것이다."머리털이 쭈뼛 섰다. 할머니의 그 말이 순식간에 기억 속을 관통하더니, 유년에 봤던 영화의 오프닝 장면을 자동으로 재생시켰다. 우크라이나 국기처럼, 파란 하늘 아래 대평원의 노오란 해바라기들이 바람에 흔들리던 그 장면.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2.02.07 18:27
1998년 초, 평화시장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 마치 동굴 속을 더듬듯, 비좁은 계단을 한참 올라가 마주한 허름한 노조 사무실. 촬영 허가를 구하기 위해 간 거였다. 당시 단편영화 연출팀 막내였었는데, 노동운동을 했던 감독이 그 낡은 평화시장 건물에서 촬영하고 싶어했다. 노동자의 비애를 다룬 라는 35mm 단편영화. 장소 협조를 구하는 우리의 말을 경청하던 중년의 상근자가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문 닫는 건 아시죠?”촬영이 끝난 후,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정말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2.01.07 17:12
노동영화는 그 존재 자체가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곤 한다. 1990년 한국에선 상영을 저지하기 위해 대학가 상공에 경찰 헬기가 떴다면, 1953년 미국 뉴멕시코주에서는 촬영을 막기 위해 소형 비행기가 세트장 위를 수시로 활강했다. 극우 자경단은 아예 세트장에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정부와 경찰과 자경단으로부터 동시다발적으로 탄압 받은 미국 영화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1954)이 그 주인공.매카시 시대, 반공주의 광풍에 영화인들이 투옥되고 아침마다 일자리를 잃었다. 블랙리스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1.12.17 09:33
지난 12월 10일, 짧은 동영상 한 편이 전세계에 타전됐다. 뉴욕주 버팔로의 한 스타벅스 매장의 노조 설립 찬반 투표 결과가 막 발표되고 있었다. 숨을 멈추고 있던 스타벅스 직원들이 결과가 발표되자 소리를 지르며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미국 스타벅스 5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노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그 동영상을 내 SNS 계정에 올리며 이렇게 첨언했다. “장담하건데, 이 장면은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만큼 명치께가 저릿했다. 그런데, 그 영상 속 장면과 똑닮은 영화가 이미 존재한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노조 설립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1.11.16 12:00
“아이 안 낳으려고요. 못 할 짓 같아요.” 얼마 전, 같이 작업하는 스텝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그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고 했다. 가뜩이나 불평등으로 얼룩진 세계인데, 기후와 환경까지 망가진 곳에 어떻게 아이를 낳겠냐는 것.하기야 ‘기후 출산파업’ 운동이 등장하는 시대다. 세계 지도자들이 기후위기 해법을 제시하지 않으면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캠페인. 또 세계 곳곳의 여론조사에서도 기후위기가 출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대답이 쏟아지고 있다. 출산 행위 자체가 죄의식이 되는 기이한 세계.아마도 영화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1.10.15 16:23
“제보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2015년 던킨도너츠 인천공장이 위생 문제로 폐업돼 일자리를 잃은 경험이 있다.”지난 10월 5일, 제보자가 전면에 등장했다. 던킨도너츠 공장의 위생 문제를 세상에 알린 후, 회사 측과 보수언론이 ‘영상이 조작됐다’라는 기사들을 일제히 융단폭격하듯 유포하던 시점이었다. 회사 측은 제보자 신원 공개와 무기한 출근정지 처분으로 보복에 나섰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이 ‘민노총’ 소속원의 소행이라는 프레임을 양산하고 있던 터였다. 평소 노동운동을 달가워하지 않은 대중들도 그럴 줄 알았다며 신나게 혐오의 맞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1.09.16 13:44
‘압도적 성공’. 지난 7월, 아이슬란드에서의 주4일 근무제 실험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는 전 세계 언론의 요란한 호외를 접한 후, 기민하게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가 이오셀리아니의 걸작 이다.이 영화는 러닝타임 10분이 지나도록 거의 대사가 없다. 월요일 아침, 귀청을 때리는 세 개의 괘종시계 알람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는데, 주인공인 중년의 용접 노동자가 공장에 출근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퇴근하는 일상을 건조하게 나열한다. 그런데 다음 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루틴으로 출근을 하던 주인공이 공장 앞에서 냅다 도망을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1.08.17 12:14
8월 12일, 38세의 알제리 청년이 성난 군중들에게 방화범으로 몰려 집단 린치를 당하고 불에 태워졌다. 단지 이 청년은 산불을 끄고 지역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던 것뿐인데, 최악의 산불 재난으로 점화된 대중의 광기와 폭력이 한 인간의 선량함을 집어삼킨 것이다. 앞서 터키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8월 1일 안탈리아의 성난 농부들이 칼을 들고 몰려가 쿠르드 노동자들을 마을에서 내쫓았다. 산불 용의자로 의심된다는 거였다. 8월 5일 터키 아이딘 지역에서는 100여 명의 시민들이 도로를 점건한 채 쿠르드족 운전자들을 닥치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1.07.16 14:49
2000년, 홍석천의 커밍아웃은 한국 성소수자 가시성의 역사에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대중들에게 성소수자의 실존을 널리 알린 신호탄.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모임이 결성되고, 민주노동당과 문화연대를 비롯한 진보진영이 연대를 표명했다. 그런데 연대 요청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주노총, 언론노련, 방송사 노조 등 노동단체들은 뜨뜻미지근했다. 뜻밖의 반응이었다.커밍아웃 직후, 홍석천은 MBC ‘뽀뽀뽀’와 KBS 라디오 시트콤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된 터였다. 다른 출연 건들도 모두 취소됐다. 명백히 성정체성이 해고 사유인 첫번째 사건. 지지 모임이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1.06.16 09:39
한강 의대생과 평택항 청년 노동자.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두 죽음을 대하는 세상의 다른 온도가 왠지 석연찮았다. 한 달 전쯤, 페이스북에 사람들이 왜 한강 의대생 죽음에만 관심을 갖는지 의구심을 토로했다. 그러자 답글 하나가 달렸다. 한강 사건에는 거대한 미스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미스터리라.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강 사건은 언론의 과도한 의제 설정과 음모론에 기댄 유튜브 방송들의 난립으로 부풀려진 말풍선이 아니던가. 반면에 평택항 사건은 피해자는 있는데 관리 책임자들 모두가 결백을 주장하는 기이한 사건이었다. 도대체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1.05.17 14:11
4월 26일, 전국이 들썩였다.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언론들은 앞다퉈 호외를 날렸고, 사방 도처에서 축하 메세지들이 축포처럼 쏟아졌다. 충분히 축하할 만한 일. 윤여정의 쾌거는 분명 하나의 사건이었다. 청와대도 서둘러 축전을 보내며 이렇게 영화 감상평을 덧붙였다.“가족의 이민사를 인류 보편의 삶으로 일궈냈고, 사는 곳이 달라도 모두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을 확인해줬다.”영화 가 재현한 한국인의 미국 이민사는 ‘인류 보편의 삶’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공교롭게 바로 전날인 4월 25일에도 일군의 사람들
-
오피니언 >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21.04.15 16:48
시골집 노모의 택배가 도착했다. 머위, 쑥, 미나리, 냉이, 수삼 등 바리바리 싸서 보냈다. 상자를 열자마자 봄 냄새가 와락 달려든다. 침샘이 맹렬히 흘렀지만, 한편으론 속이 상했다.보내지 마시라 한사코 만류한 터였다. 이걸 서울로 보내려면 여든에 가까운 노친네가 손수레로 20kg 무게의 상자를 끌며 높은 언덕을 오르내리고, 2킬로 남짓 떨어진 읍내의 농협까지 가야 한다.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무겁다면서도 기어이 보낸 거였다.예전엔 전화만 하면 우체국 직원이 달려와 냉큼 가져갔다. 직접 연락하라며 개인번호도 줬다는 살가운 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