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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2023.01.26 14:43
1979년 8월 9일 YH무역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YH’는 설립자 장용호의 ‘용’과 ‘호’에서 따온 이름이다. YH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께 그의 이름은 노동운동사에서 뿐 아니라 한국사에서도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이름이 되었다. 뉴욕 한국무역관 부관장직을 지낸 장용호는 1966년 자본금 100만원으로 왕십리 콩나물 공장을 빌려 가발공장인 YH무역을 창립했다. 노동자 10여명으로 시작한 YH무역은 4년 만인 1970년 수출 1백만 달러, 노동자 4천여명의 국내 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했다. 정부의 막대한 지원과 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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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2022.12.29 10:56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서 조합원들의 단결력이 강한 노조로 원풍모방노동조합을 빼놓을 수 없다. 조합원의 단결력이 강하다는 것은 일상활동을 잘 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원풍모방노동조합 일상활동의 두 축은 소모임과 교육이었다.원풍모방 민주노조운동은 1972년에 한국모방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에서 시작하였다. 1974년 말 회사가 원풍그룹으로 넘어가면서 1975년부터는 원풍모방노동조합으로 이어졌다. 원풍모방노조가 서슬 퍼런 유신체제 아래서도 민주노조활동을 벌여나갔던 힘은 소모임에서 나왔다. 대의원, 상집간부 소모임은 물론 종교, 취미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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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2022.11.23 16:12
이 글에는 국가의 폭력에 희생된 김주열 열사 시신 발견 직후 찍은 사진으로, 다소 잔혹한 모습이 포함돼있습니다.때로는 역사의 이름이나 숫자가 실체를 앗아 가기도 한다. 1960년 ‘4월혁명’도 시간이 흘러갈수록 단어로만 기억되기 쉽다. 3.15부정선거 항의 시위 희생자를 포함 186명이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쉽게 잊고 지나친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삶이나 실천에는 흔히 말하듯 소설책 몇 권으로도 모자랄 사연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누구 누구 등외 몇 명이 어디 있으랴. 1950년대 말에 이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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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2022.10.26 13:43
올해도 11월 12일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매년 가을 전태일 열사의 분신 주기를 전후해서 열리는 전국노동자대회가 시작된 날이 1988년 11월 13일이다.1987년 7.8.9 노동자대투쟁에 노동자 1천 명 이상이 일하는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75.5%가 쟁의에 참가하였다. 세 달도 안 되는 기간에 3300여 건에 이르는 쟁의가 발생하였고, 모두 122만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투쟁에 참가하였다. 노동자들은 먼저 일하는 작업장을 점거하고 파업농성을 벌이면서 ‘노조결성의 자유-민주노조 쟁취’, ‘임금인상’ ‘인간적 대우’를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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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2022.09.23 15:57
ㅇ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끝난 ‘해방공간’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 가능성을 열어준 희망의 공간이었다. 해방 공간에서 지금으로 치면 ‘임을 위한 행진곡’처럼 많이 불렸던 노래가 ‘해방의 노래’였다. 당시 최고 수준의 작곡가이며 수많은 ‘민중가요’ ‘해방가요’를 작곡한 김순남이 작곡했다. 1.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2.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야 놈들에게 빼앗겼든 토지와 공장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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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2022.08.23 13:50
예전에 학생들이 안중근과 유관순을 모른다고 시끌벅적한 적이 있다. 목소리 높여 꾸짖는 사람들에게 왜 알아야 하는지 묻고, 열 받는 당신들은 얼마나 잘 아는지 알려달라고 하고 싶었다. 강주룡이나 이재유는 아냐고 되물으면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했다. 이재유는 일제 식민지 시기 ‘당대 최고의 혁명가’, ‘19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라는 표현처럼 굽히지 않는 사회주의 혁명가였으며, 손꼽히는 혁명적노동조합운동의 지도자였다. 18년 동안 사회주의운동에 앞장섰으며, 세 차례 일제의 감옥에 갇혀 12년 동안 전향하지 않고 끈질기게 옥중투쟁을 벌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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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2022.07.22 13:54
1931년 5월 29일 새벽,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고공농성을 벌였다. 지금까지 알고 있기로는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고공농성 1인 시위였다. 주인공은 평양의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의 지도자 강주룡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강주룡을 ‘아직 조선 노동운동 선상에서 보지 못하던 새 전술’을 벌인 ‘체공녀’로 불렀다.식민지 시기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같은 시간 일을 하고도 조선인 남성 노동자들에 비해 2분의 1, 일본인 남성노동자들에 비해서는 4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고무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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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2022.06.23 13:18
1929년 1월부터 4월까지 원산지역 3천 여명의 노동자들이 80여일 동안 파업을 했다. 원산총파업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노동운동의 물길을 가르는 식민지 강점기의 가장 큰 파업투쟁이었다.1928년 9월 7일, 원산 가까이 있는 영국계 석유회사 라이징 선의 문평제유공장에서 악질 일본인 현장 감독 고다마가 조선인 노동자 박준업을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문평제유공장은 일본 고오베에 있는 총지점을 거쳐 들어오는 각종 석유를 정유하여 조선 각지와 만주.간도에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제유공장 노동자들은 '감독 파면'과 '최저임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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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2022.04.24 14:48
1919년 ‘3.1운동’은 1910년대와 1920년대를 가르는 분수령이자 이후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저수지가 되었다. 3.1운동 당시 전체 인구 가운데 노동자 수는 많지 않았으나 초기 단계부터 노동자들끼리 또는 시민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나섰다. 운동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투쟁의 분위기를 이어나갔다.1919년 3월 9일 오전에 시작한 전차 노동자들의 파업은 3월 29일까지 20일 동안 계속되었다. 3월 10일 종로 4가에서 300여 명의 시위대는 파업에서 빠져나가 전차를 몰던 운전수를 폭행하고, “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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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2022.03.22 16:48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노동자들이 앞장섰던 노동운동은 아니다. 노동운동사는 아니라도 근현대 민중항쟁 가운데 노동자들이 알고 넘어가야 할 역사이다.우리 근현대사를 돌아보았을 때 역사의 희망이 사라진 듯하고 역사적 낙관주의가 희미해져가는 절망의 상황에서 늘 ‘사건’이 터져 나왔다. 한 사건이 가라앉고나서 한 세대 30년이 넘기 전에 또 다시 전국규모의 민중항쟁이 이어서 일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 전국 규모로 일어난 민중항쟁, 사회변혁운동으로 꼽을 만한 사건은 일제 강점기 1919년 ‘3.1운동’, 해방후 194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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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2022.02.23 09:55
입장(立場)은 서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생각이나 관점을 뜻하기도 한다. 흔히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쓰기도 하다. 입장에 따라 입장이 달라진다는 말을 만화 에서는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라고 표현한다. 입장에 따라 이해관계가 달라진다. 어떠한 사건이나 사실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다 좋은 것도 다 나쁜 것도 아니다. 새로운 상황은 누구에게는 이익을 가져다 주지만 누구에게는 손해를 끼친다.1876년 개항을 시작으로 조선사회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휩쓸리기 시작하였다. 개항 뒤 조선의 무역체제는 조선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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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2022.01.21 15:25
하루 하루 정보는 홍수처럼 넘쳐 나는데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기 어렵다. 현실도 잘 모르는데 머나먼 과거 역사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 살아오면서 경험으로 알다시피 역사를 몰라도 살아가는데 큰 지장은 없다. 업으로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역사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돈 벌어 주는 것도 아니다. 어느 때 문득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기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생각 없이 막살고 싶지 않을 때 역사를 들춰보게 된다. 현실이 막막하고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광주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