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우리를 지키는 싸움에서 승리하는 싸움으로”

[전태일 50주기 여성노동자 인터뷰]
작업치료사, 임미선

  • 기사입력 2020.12.07 18:13
  • 최종수정 2020.12.09 23:52
  • 기자명 송승현 기자

2020년 전태일 열사 항거 50주기를 맞았다.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를 외치고 산화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한 것은 노동자의 권리였다.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 고발이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열악한,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지키고자 했다. 민주노총은 여전히 불평등에 맞서는 여성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노동과세계〉에서 소개한다. [편집자주]

 

“우리를 지키는 싸움에서 승리하는 싸움으로”
작업치료사, 임미선

임미선 보건의료노조 금천수요양병원지부 지부장. ⓒ 송승현 기자
임미선 보건의료노조 금천수요양병원지부 지부장. ⓒ 송승현 기자

작업치료사 11년 차 임미선입니다. 대학 작업치료과를 졸업했고요, 국가고시를 치러서 면허증을 땄어요. 그리곤 2010년 고려수요양병원 부천점에 입사했어요. 왜, 의대는 임상 나간다고 하잖아요? 이 병원에 인턴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때는 고려수요양병원이 하나였어요. 이후 회사는 구로점과 금천점을 오픈했고 저는 6개월 인턴이 끝나고 구로점, 2012년 6월에 금천점에 오게 됐어요. 그래서 고려수요양병원은 제게 첫 직장이면서 11년 동안 근무한 곳이에요.

심리학에 관심이 있긴 했지만, 사실 대학에 갈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물리치료학과에 원서 넣은 친구가 작업치료과를 소개했죠. ‘여기서 심리학도 알려준다더라~’하면서요. 그리고 집안 사정상 빨리 취업해서 돈 벌어야 했거든요. 심리학도 알려주고 취업이 잘 된다는 것 때문에 보건계열을 선택했고, 지금은 작업치료사로 일하게 됐어요.

대학 때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저 심리학에 관심이 있었을 뿐인데, 막상 배워보니 너무 어려운 거예요. ‘내가 이 길이 맞나…’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친구들도 제가 다른 분야로 갈 거로 생각했는데요. 첫 시험에서 바로 합격하고 임상 나와보니 너무 잘 맞는 거죠. 동료들이나 환자들과 지내는 게 좋았던 게 이유인 것 같아요.

우리 병원에는 뇌졸중, 파킨슨, 치매, 척수손상 등 중추신경계 손상 환자들이 많아요. 그분들이 재활하는 병원이죠. 물리치료가 신체적인 부분을 치료하는 거라면, 저희는 환자들이 일상생활로 복귀할 때 필요한 신체적, 인지적, 연하곤란 등의 치료를 하고 있어요. 환자들 사회 복귀도 돕죠. 발병 전후의 삶이 너무 차이가 나거든요. 무리 없이 일상생활도 하고 사회적으로도 지위나 역할을 분명했던 사람들인데, 병을 얻으면서 모든 게 한꺼번에 상실된 거예요. 퇴원 후에 다시 세상에 적응해야 하잖아요. 그 과정을 돕는 거죠. 경증 환자에겐 직업도 물어봐요. 그러면서 사회 복귀나 직업 복귀에 관해 같이 상담도 하고요.

제가 다닌 학교가 1999년도였나,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작업치료학과예요. 역사가 짧죠? 재활요양병원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한 것도 20~30년밖에 안 됐어요.

우리 병원 재활치료부는 대부분 20~30대 여성들이 많아요. 기본적으로 환자 한 명을 치료사 한 명이 담당하는데, 타임 테이블이 환자마다 30분이에요. 30분 이내에 환자분을 모시고 와서 치료하는 것까지가 제 업무입니다. 과정 중에 간병사님이 도와주기도 하지만 치료는 온전히 저희 몫이니까요.

저희는 8시 30분에 출근해서 그때부터 30분 단위로 치료에 들어가요. 가령 첫 30분에 환자 한 분을 치료하고 5분 대기한 뒤 그다음 30분 동안 다른 환자 한 분을 치료하고 다시 5분 대기하는 방식으로 8시간을 일해요. 그렇게 주5일 출근하고 격주 토요일 4시간 추가 근무가 있어요.

저희가 하는 일은 굉장히 위험할 수 있는 일이에요. 순간적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환자 낙상으로 이어지거든요. 그래서 평일 저녁에도 어디 못 가요. 푹 쉬면서 체력 보충해야죠. 충전하고 치료하고, 다시 밤에 충전하고 낮엔 치료하는 일상이에요.

치료사 중에 손목이나 허리, 어깨통증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치료받으러 다른 병원에 갑니다. 차마 동료에게 치료를 받을 수 없으니까요. 다른 곳에 가서 진단도 받고 물리치료도 받고….

재작년에는 저희 조합원 중 한 명이 손목 관련 질병을 진단받아서 병가 들어갔어요. 초대 지부장님은 어깨 손상으로 대학병원 다니며 치료받고요, 다른 직원은 환자분을 옮기다가 허리디스크가 왔어요. 저도 허리디스크 진단받았죠.

이런 게 다 산재보험 되는 거 아닌가요? 너무 당연한 건데, 그런데도 저희는 산재를 신청할 생각을 못 했어요. 그게 어떤 건지도 모르고 살았죠. 초대 지부장님이 노조 설립 전 팀장이었을 때 환자분 치료 중 손가락 부러진 적이 있어요. 이 분이 처음 산재신청을 했죠. 그래서 알았어요. ‘아, 우리도 산재신청을 할 수 있는 거구나.’ 산재도 인정됐죠.

그런데요, 회사가 보복했어요. 팀장 직위를 박탈한 뒤에 2년 동안 혼자 일하는 공간으로 배치해버린 거예요. 온갖 협박도 끊이지 않았어요. 중간관리자가 팀장에게 “팀 내에서 권고사직 대상자를 한 명씩 뽑아라” 그랬대요.

믿었던 회사에 배신당한 느낌이었죠. 우리가 어렸을 때는 여기서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회사도 잘 되고 병원도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겉만 번지르르했던 거죠. 이 회사에 와서 팀장이 된 분이 회의에 들어가 보니 직원들에게 알려진 것과 완전 다르더래요. 내부에선 직원들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일이 결정되면서, 우리에겐 마치 좋은 것처럼 포장하는…. 어떤 배신감이 들었죠. 열심히 일한다는 게 누군가가 가진 것을 뺏어야만 살아남는 구조였다는 걸 알았어요. 그 팀장님이 저희 지부 초대 지부장님이었는데요, 그분 통해서 병원의 실상을 모두 알게 된 거죠. 노조 설립 전에 성희롱 문제도 있었고, 연차수당 한 번 받아본 적 없었고 노동절에 쉬어본 적도 없었어요.

우리 병원에 좋은 치료사 선생님들이 많았어요. 그랬던 선배들이 다 병원을 떠나는 거예요. 그 이유를 그때야 알게 된 거죠. 그때 초대 지도부를 맡았던 심희선, 김지윤 치료사가 먼저 “같이 노동조합 해볼래?” 그렇게 권유했어요. “알겠다”라고 했죠. 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금천수요양병원지부가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2015년에요.

1년 정도 걸렸어요. 저 자신도 저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우리 중에 누가 노동운동을 해봤고 누가 노동조합을 해봤겠어요? 노조가 노동조합의 줄임말인지도 몰랐는걸요. 저는 그저 여행에 관심 많고 평소에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는 거 좋아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변한 거죠.

당연히 노조 설립방해가 심했어요. 설립 총회 이틀 전에 회사에 그 사실이 알려졌는데, 사측은 조합원이 누군지 색출해내기 시작했어요. 치료실 안에선 노조의 ‘노’자도 못 꺼낼 분위기였고요, 다른 팀원들도 저를 피했어요. 모든 조합원이 노조 설립 당시 겪었던 일이에요. 우린 병원에서 소수였거든요.

저희 조합원들은 당시에 다 연차가 낮은 직원들이었어요. 반면 한국노총 조합원들은 수도 많고 연차도 높았죠. 노조 설립하고 사측은 1년 정도 노조를 없애려고 소송도 걸었죠. 지도부에게 한 명당 3천만 원씩요. 우리는 체불임금 진정을 냈거든요. 그랬더니 사측은 그동안 일했던 토요일 수당을 잘못 지급했다며 다시 받아가겠다는 거예요. “진정을 취하하지 않으면 가져가겠다!” 저희는 당연히 안 했어요. 그랬더니 병원이 월급을 강제로 공제하더라고요. 처음엔 조합원들이 피켓팅에도 못 나왔어요. 몇 개월 동안요. 피켓팅하고 페이스북에 소식 올리면 바로 조합원에게 협박서를 보냈거든요.

저희 조합원이 13명이에요. 처음엔 27명이었는데, 점점 줄었죠. 설립 당시 영양부를 외주화하면서 민주노총 조합원이 절반으로 준 거에요. 이후 남은 조합원들이 지금까지 노동조합을 지키고 있어요. 조합원들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정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병원은 하루가 멀다 하고 조합원들에게 징계를 주고 소송을 걸었거든요. 가압류는 물론 해고도 했죠.

지난 시간을 생각해보면 우리 조합원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 안 나와요.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극복하며 여기까지 왔던 것 같아요. 한 번은 조합원 친구 한 명이 무급휴직이 안 돼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못 보낸 경우가 있었어요. 말 그대로 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됐죠. 그때 조합원 회의하면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어요. “○○ 씨, 우리가 연차 돌아가면서 쓰고 아이 돌볼게요”라고요. 그때 저는 정말 감동받았어요. 우리 조합원들이 정말 지혜롭다고 생각해요. 저도 많이 부족하지만, 노동조합 안에서 공동체를 배우는 과정인 것 같아요. 같이 지키고 함께 연대하고 배워가는 게 정말 많네요.

노동조합이 설립 뒤에 제도적으로 바뀐 것도 많아요. 6개월 인턴제도가 폐지됐고요, 노동절 대체공휴일도 처음으로 쉬었어요. 연차수당이며 최저임금 위반 체불임금도 받았죠.

사실 중소병원에 노동조합이 있는 곳이 많진 않아요. 저희는 노조가 있으니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더 열악한 곳도 많죠. “5년간 어땠어요?” 누가 물어도 다 기억나진 않아요. 순간의 감정도 그때의 상황도…. 다만, 지금 딱 생각이 드는 건 ‘우리 조합원들이 정말 좋다’라는 거예요.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겠죠?

다만 그동안은 우리를 지키는 싸움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승리하는 싸움으로 병원의 변화를 만들어낼 거라 믿어요.

임미선 보건의료노조 금천수요양병원지부 지부장. ⓒ 송승현 기자
임미선 보건의료노조 금천수요양병원지부 지부장. ⓒ 송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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