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명숙의 인권프리즘] 애도의 권리와 의례의 정치

추모비를 숨기려는 사람들

  • 기사입력 2021.05.25 09:54
  • 기자명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서울의료원에 가면 정문 오른편엔 하늘을 바라보는 듯 파란색 카네이션이 서 있다. 2019년 1월 서울의료원에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사망한 고 서지윤 간호사의 추모비다. 서울의료원 간호사들의 근무복을 상징하는 파란 꽃 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너무 빨리 별이 된 그대/ 다른 누군가 눈물 흘리는 밤/ 희망의 빛 한줄기 되어주기를”

‘희망의 빛 한줄기’라…. 추모비가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을까.

서 간호사 조형물. ⓒ 명숙
서 간호사 조형물. ⓒ 명숙

서 간호사의 사망 직후 구성된 시민대책위의 요청으로 서울시는 3월에 ‘서울시 서울의료원 간호사 사망사건 진상대책위원회(이하 진상대책위)’를 구성하였고, 9월 6일 진상대책위는 서지윤 간호사의 사망은 직장 내 괴롭힘에 의한 사망이라는 조사결과와 함께 34개의 권고안을 발표하였다. 이에 앞서 서울시장은 고인의 어머니를 만나 사과하는 자리에서 권고안을 조속히 이행할 것이며 추모비도 서울의료원에 세우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권고안은 아직도 제대로 이행되고 있지 않다. 병원 측이 추진하던 정책을 권고안인양 둔갑시키기도 했다. 추모비 건립을 반대하는 서울의료원 때문에 근 2년 만에 겨우 추모조형물이 세워졌다.

서울의료원은 처음에는 추모비를 보면 고인의 동료들이 고인의 죽음을 떠올려서 힘들어질 수 있다며 반대하였다. 한마디로 잊으라는 것이다. 기억과 망각의 싸움이다. 그것도 안 먹히자 나중에는 추모조형물을 보이지 않는 구석에 작게 세우라고 하였다. 심지어는 추모조형물 제막식이 끝나자마자 서울시와 작가에게 항의했다고 한다. 추모조형물에 서간호사의 얼굴과 어머니의 편지를 담은 동판을 달아서 애초 말한 작품과 달라졌다는 게 이유다. 추모비에 망자의 사진과 유족의 그리움을 담은 문구 하나조차 싣지 못하는 게 말이 되는가.

애도와 의례의 정치

혹자는 이러한 병원의 행태를 보고 면왜 이렇게 지나치게 행동하나 싶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나침은 곳곳에 있었다. 2018년 12월에 사망한 발전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의 추모조형물도 2년이 훌쩍 넘어서야 겨우 세워졌다. 서울의료원처럼 서부발전소도 추모비를 보이지 않는 곳에 작게 세우라고 온갖 떼를 썼다. 자주 겪는 일이다. 애도와 의례도 가해자들과의 싸움, 정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전의 재난참사의 사건도, 4․3제주항쟁이나 4․19민주화항쟁 같은 국가폭력도 그러했다. 세월호참사 추모공원도 올해에야 시공이 시작되지 않았는가. 7년이 걸렸다. 대구지하철참사 추모비는 어떠한가. 보이지 않는 곳에 사건의 의미를 흐릿하게 만드는 형태로 있다. 망자의 죽음과 관련 없는 장소에 놓거나 추모비를 숨기려는 자들은 대개 폭력의 주체들이다.

김용균 노동자 추모조형물. ⓒ 명숙
김용균 노동자 추모조형물. ⓒ 명숙

추모식와 추모비와 같은 의례는 죽은 자에 대한 예우이며, 산자를 위로하는 일이다. 나아가 애도공동체에게 죽음의 공백을 메우고 개인적 사회적 삶의 방향성을 전달하는 애도의 기능을 수행한다. 개인적인 슬픔과 추모의 의미를 넘어 망자와 살아남은 자들을 연결하고 사회적 의미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병원의 직원들은 카네이션 조형물을 보며 서간호사를 추모할 뿐 아니라 괴롭힘으로부터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볼 수도 있다.

이렇듯 추모의 의례를 통해 사람들은 국가폭력이나 괴롭힘이나 산재 없는 인간 존중의 질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아가 추모비는 국가나 기업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표현한다. 반대로 이를 막고자 하는 세력들은 추모비를 망자와 산자와 연결지점이 없는 장소에 놓거나 망자의 원한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이렇듯 애도와 의례는 권리이자 투쟁의 영역이다. 애도가 충분히 보장되고, 애도가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만드는 것이 애도와 의례의 정치다. 그래서 여러 죽음의 현장에서는 살아남은 자들이 제대로 된 추모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매일 계속되는 죽음의 소식은 다시 한 번 나를 짓누른다. 우리의 애도가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추모비가 희망의 빛이 되려면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애도와 의례가 현실을 바꾸는 투쟁과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됨을 다시 깨닫게 하는 날들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