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김정수의 99%를 위한 노동안전보건] 현직 질판위원이 본 산재처리 지연 개선 방안

  • 기사입력 2021.05.27 10:48
  • 기자명 김정수 향남공감의원 원장

 

산재처리 지연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산재처리 지연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는지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 더 이상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듯하다.

이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이 몇 가지 개선 방안을 제시하고 공단 이사장이 그 내용을 가지고 언론과 인터뷰하고 기고글을 썼는데 이것이 오히려 더 공분을 사고 있다. 산재처리 지연에 대한 근로복지공단의 왜곡된 인식과 함께 근본적으로 개선 하고자 하는 의지와 역량이 부족함을 여실히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책 중 하나는 과거부터 노동계와 전문가들이 꾸준히 제기해왔던 ‘선 보장 후 정산’ 제도이다. 이 제도만 도입되더라도 산재처리 지연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고통은 상당히 완화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십 수년전부터 제기되어 왔는데 그 때마다 정부는 시기상조라는 반응이었다. 도대체 적절한 시기는 언제쯤이며 그때까지 받게 될 노동자들의 고통은 또 누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노동계에서는 2019년에 근골격계질환에서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추정의 원칙’ 적용 대상을 대폭 확대하고 즉각 적용하는 것, 특별 진찰 결과 즉시 승인 대상을 확대해 판정위원회까지 가는 사건 수 자체를 대폭 줄이는 것 등도 대책으로 제기하고 있다.

필자는 4년 전부터 질판 위에 참여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런 대책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질판위에 참여해 보면 업무 관련성이 너무도 명확하여 ‘꼭 이런 건까지 질판위에서 승인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가?’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건이 매 회차에 여러 건 있다. 이런 건들은 대부분 판정위원들 사 이에 별반 토론 없이 승인 결정하고 넘어간다. 그러다 보면 한번 회의하는 동안 심도있게 토론하는 건이 몇 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2020년 전체 근골격계질환 신청건 9,925건 중 367건(3.7%)이 ‘추정의 원칙’을 적용받아 승인되었다고 한다. 2020년 전체 근골격계질환 승인율이 70.5%였으니 향후 확대할 수 있을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추정의 원칙’ 적용 대상을 대폭 확대하고 즉각 적용할 경우 산재처리 지연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근골격계질환 뿐만 아니라 뇌심혈관계질환, 호흡기 질환 등으로 확대하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는(인정 기준이 근골 격계질환에 비해 상대적으로 명확하므로) 근골격계질환보다 다소 용이할 수도 있다. 이 또한 적극 검토 되어야 할 것이다.

특별 진찰 결과 즉시 승인 대상을 확대하는 것 또한 적극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지금까지 판정위원회에 참여하면서 검토해 본 특별 진찰 결과는 대부분 상세한 사실 관계 조사와 관련 문헌 검토를 바탕으로 매우 충실하게 소견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위원들 간의 토론 과정에서 특별 진찰 결과는 상당한 신뢰도를 가지며, 최종 결과는 특별 진찰의 소견과 동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인지 아니면 보편적인 현상인지는 특별 진찰 결과 업무 관련성이 높음으로 나온 경우의 승인율을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올해 2월에 근로복지공단에서 특별 진찰 결과 업무관련성 ‘매우 높음’ 판정을 받으면 판정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승인하도록 규정을 변경했는데 이를 ‘높음’ 판정을 받은 경우로 확대해도 별 다른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상병명이 인정되지 않아 불승인되거나 보류되는 경우가 의외로 꽤 많은데 이 또한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산재 인정을 위해서는 첫째, 상병명이 명확해야 하고 둘째, 업무관련성이 높다고 인정되어야 한다. 명확한 상병 확인은 업무관련성보다 앞서는 전제조건으로 상병이 명확히 확인되지 않을 경우에는 업무관련성을 논할 수 없다. 그래서 상병명이 인정되지 않으면 업무관련성 여부와 무관하게 불승인되거나 상병명 확인을 위해 보류된다. 이미 수개월에 걸쳐 업무관련성 평가를 위한 조사까지 마친 건이 상병명 불인정으로 불승인되는 것은 명백한 행정력 낭비다. 상병 확인 절차와 업무관련성 인정 절차를 구분하여 상병이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 건을 신청 초기에 미리 판단해 주면 이런 행정력 낭비와 이로 인한 산재처리 지연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했던 방안들 중 맨 처음 언급했던 ‘선 보장 후 정산’ 제도는 가장 근본적인 대책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실제 시행에 앞서 검토하고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을 수 있고 시행 여부를 근로복지공단이 단독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 외 나머지 방안들은 근로복지공단 내부 지침만으로도 충분히 시행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방안들만 시행된다고 하더라도 산재처리 지연을 상당히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이 ‘세계 최고의 사회보장서비스기관’이 되려면 우선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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