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성소수자도 노동자다

  • 기사입력 2021.07.16 14:49
  • 기자명 이송희일 영화감독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2000년, 홍석천의 커밍아웃은 한국 성소수자 가시성의 역사에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대중들에게 성소수자의 실존을 널리 알린 신호탄.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모임이 결성되고, 민주노동당과 문화연대를 비롯한 진보진영이 연대를 표명했다. 그런데 연대 요청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주노총, 언론노련, 방송사 노조 등 노동단체들은 뜨뜻미지근했다. 뜻밖의 반응이었다.

커밍아웃 직후, 홍석천은 MBC ‘뽀뽀뽀’와 KBS 라디오 시트콤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된 터였다. 다른 출연 건들도 모두 취소됐다. 명백히 성정체성이 해고 사유인 첫번째 사건. 지지 모임이 결성된 이유 중 하나도 해고 부당성을 알리는 거였다. 하지만 당시 노동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직장에서 성소수자가 차별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난생 처음 받아보는 낯설고 생경한 질문에 못내 머뭇거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21년 후, 사정은 좀 나아졌을까? 7번째 발의된 비운의 차별금지법을 경유하고 있는 지금, 다행히 민주노총 등 노동계는 제정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 대신, 세상의 질문은 더 후져졌다. ‘도대체 성소수자가 직장에서 받는 차별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인터넷 곳곳에 지뢰밭처럼 깔려 있다.

이 질문은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애초의 차별적 조건을 배제한다. 정체성을 드러내면 홍석천처럼 불이익이 쏟아질까봐 침묵할 수밖에 없는 그 구조적 조건 말이다. 굳이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없는 디폴트 세계의 이성애자 시민들은 이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 잘난 ‘공정’의 이름으로 무슨 차별을 받고 있냐고 사례를 달라며 윽박지르고 있다.

당연히 이런 조건에서 퀴어 ‘노동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하지만 쉽게 조우하지 못하는 투명의 존재들. 이 답답한 속사정은 영화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는 레즈비언이라든지, 예술-패션계에서 일하는 게이라든지 이분화된 젠더양식을 수식하기 위해 정형화된 이미지들이 지루하게 재현되기 일쑤다. 또는 드라마틱한 갈등을 위해 학교 선생, 성직자, 스포츠 선수 같은 특정 직업군들이 선택되기도 한다. 등장 인물의 '노동자성'을 집중적으로 재현하거나, 일터의 차별에 포커스를 두는 경우가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없다.

아마도 근래 ‘성소수자’와 ‘노동자’, 두 개의 키워드로 가장 많이 호명되고, 공동체 상영을 통해 노동-시민단체들이 많이 회람한 영화가 <런던 프라이드>일 것이다. 마가렛 대처가 집권하던 영국의 80년대, 파업하던 광산 노동자들과 성소수자들이 연대했던 실제 역사를 다룬 다큐영화. 그렇지만 이 영화 속 성소수자도 결국 특정의 정체성 집단으로만 표상된다. 사회적 소수자이기 때문에 노동자와 연대해야 된다는 막연한 당위와 낭만주의가 그 기저에 흐를 뿐, ‘성소수자도 노동자’라는 실재성은 누락돼 있다.

그래도 딴엔 그 동안 퀴어영화를 만들면서 성소수자 주인공들에게 노동자 지위를 부여해왔지만, 나 역시 일터와 성소수자의 관계를 세밀히 형상화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사랑이나 정체성 인정에 몰입한 측면이 컸다.

지당하게도 성소수자는 성소수자라는 정체성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 성별, 인종 등 여러 사회적 조건들 속에서 살아가는 복잡성의 존재다. 사랑도 하지만 일도 하고 월세도 낸다. 퍼레이드나 동성결혼처럼 정체성이 인정된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건 아닐 것이다. 작년 6월 미 대법원이 미국의 차별금지법에 해당되는 민권법(The Civil Right Act)에 의거, ‘직장 내 성소수자 차별 금지’ 판결을 내렸을 때, 뉴욕타임즈 사설은 동성결혼 합법화보다 더 진일보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의 경우 가시화, 퍼레이드, 파트너십, 동성결혼이라는 지난한 역사적 단락들을 거치고 나서야 뒤늦게 성소수자의 노동권이 도착한 셈이다. 그만큼 어렵지만, 또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반면, 지금 한국에선 차별금지법 제정을 두고 ‘도대체 성소수자가 직장에서 받는 차별이 무엇이냐’는 질문들과 맞닥뜨리고 있다. 21년 전 모든 일자리에서 다 짤렸다고 하소연하던 홍석천의 눈물이 무색하다. 저 질문 자체가 억압의 기제라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만큼, 세상의 일부분은 확실히 퇴보했다. 이런 질문이야말로 차별금지법이 왜 필요한지를 스스로 증거하는 자백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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