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도대체 누가 불을 질렀는가?

  • 기사입력 2021.08.17 12:14
  • 기자명 이송희일 영화감독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8월 12일, 38세의 알제리 청년이 성난 군중들에게 방화범으로 몰려 집단 린치를 당하고 불에 태워졌다. 단지 이 청년은 산불을 끄고 지역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던 것뿐인데, 최악의 산불 재난으로 점화된 대중의 광기와 폭력이 한 인간의 선량함을 집어삼킨 것이다. 앞서 터키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8월 1일 안탈리아의 성난 농부들이 칼을 들고 몰려가 쿠르드 노동자들을 마을에서 내쫓았다. 산불 용의자로 의심된다는 거였다. 8월 5일 터키 아이딘 지역에서는 100여 명의 시민들이 도로를 점건한 채 쿠르드족 운전자들을 닥치는 대로 린치했다. 애당초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쿠르드 노동자당과 쿠르드족을 산불 배후세력으로 지목하며 지속적으로 혐오의 시그널을 보낸 터였다.

2021년 지구의 7월, 142년 관측 사상 가장 더운 달로 기록됐다. 전세계가 전대미문의 폭염과 산불에 시달렸다. 전대미문의 폭염과 가뭄이 산불의 주원인인데도, 터키와 알제리에서 보듯 재난의 책임이 오롯이 전가된 ‘희생양’이 속출했다. 외부에서 왔다는 이유로, 쿠르드족처럼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페스트 창궐 때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고 탄압을 받았듯,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학살당했듯, 불가항력의 재난시 사회적 약자나 이방인이 광장에 끌려나오기 일쑤다.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타고, 역병을 가져온 죄인으로 재단에 바쳐진다. 대중들이 재난이라는 불확실성의 세계를 견뎌내지 못하는 탓도 있지만, 분노를 쏟아낼 만만한 약자를 지목하는 것으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는 지배세력의 꼼수도 이 ‘희생양 정치’의 주된 배경이다.

물론 자연재해뿐 아니라, 테러나 전쟁과 같은 재난시에도 어김없이 희생양 정치가 작동된다. 아마도 9.11 테러와 아프간 전쟁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올 3월에 개봉된 영화 <모리타니안>은 관타나모 수용소에 실제 수감됐던 슬라히의 증언록 ‘관타나모 다이어리’를 토대로, 이곳에서 어떻게 진실이 조작되고 희생양이 가공됐는지를 낱낱이 드러낸다. 9.11 테러에 대해 ‘가혹한 정의’를 원하는 부시 행정부는 관타나모 수용소에 테러 용의자들을 감금하고 그들이 자백할 때까지 고문과 협박을 반복한다.

- 누군가(Someone)는 그 일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돼.
- 그래, 누군가. 아무나(Anyone)가 아니라.

군검찰관과 정보기관 관료의 이 대사는 수용소가 왜 존재하는지를 명확하게 지시한다. 대가를 치룰 ‘누군가’를 발명하고 가공하는 것. 실제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분노를 투사할 특정의 ‘누군가’만 있으면 된다.

물론 코로나 팬데믹 하에서도 그 ‘누군가’는 끊임없이 호명된다. 유럽과 미국에서 득세한 아시안 혐오를 보자.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지난해 5월, 광장에 끌려나와 돌팔매질을 당했던 한국 성소수자들은 어땠나. 정치인, 언론과 대중들은 불야성을 이루던 서울의 이성애자 클럽 등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이 광기 서린 말들로 성소수자들을 지탄하기 바빴다. 아직도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그때의 공포와 상처를 미처 다 치유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의 ‘누군가’는 민주노총이다. 마치 7.3 노동자대회 때문에 델타 변이 유행이 일어난 것처럼 세상 요란 법석을 떨고 있는 총리와 정치권, 그리고 보수 언론들. 집회로 인한 감염이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52명 규모의 특별수사본부를 꾸리고, 집행부 조사에 이어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이상하지 않은가. 1만 명이 모인 미스터트롯 콘서트는 허용해도, 방역 수칙을 지키는 노동자집회는 허용하지 않는다. 수많은 다중이 운집하는 백화점과 쇼핑몰 영업은 허용해도, 영세 자영업은 단속된다. 실내 공장과 지하철은 괜찮지만, 광장의 생존권 목소리는 델타 변이를 퍼뜨리는 비말로 취급한다.

간단하다. 대기업의 ‘이윤’이 발생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차이. 노동자들의 생존권 절규, 자영업자들의 비명, 공공기관과 학교 같은 돌봄 공간들은 방역을 위해 단속되지만, 대기업의 이윤이 발생하는 곳은 규제되지 않는다. 한술 더 떠 재난을 핑계로 국정농단의 범죄자 이재용을 가석방하기도 한다.

광장에서 생존권을 외치는 노동자는 잡아들이고, 사익을 위해 국정농단을 한 재벌은 풀어주고. 재난 자본주의의 두 얼굴. 도대체 누구를 위한 방역인가? 왜 코로나 팬데믹을 경유하며 불평등은 더욱 가속화되고 대기업들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가? 왜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생존권 시위마저 봉쇄되어야 하는가? 보수언론과 정치권의 노동자 혐오에 편승해, 방역 실패 책임을 민주노총에 전가하려는 저 지겨운 ‘희생양 정치’가 또다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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