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우리 시대의 소금, 차별금지법

  • 기사입력 2022.01.07 17:12
  • 최종수정 2022.02.07 09:59
  • 기자명 이송희일 영화감독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노동영화는 그 존재 자체가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곤 한다. 1990년 한국에선 <파업전야> 상영을 저지하기 위해 대학가 상공에 경찰 헬기가 떴다면, 1953년 미국 뉴멕시코주에서는 촬영을 막기 위해 소형 비행기가 세트장 위를 수시로 활강했다. 극우 자경단은 아예 세트장에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정부와 경찰과 자경단으로부터 동시다발적으로 탄압 받은 미국 영화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대지의 소금 Salt of the earth>(1954)이 그 주인공.

매카시 시대, 반공주의 광풍에 영화인들이 투옥되고 아침마다 일자리를 잃었다. 블랙리스트 영화인 3명이 뭉쳐 이 영화를 시작했는데, 국제광산노조가 제작비를 대고 몇몇 전문배우를 제외하고 노조원과 지역 주민들이 직접 출연했다. 즉각 미 당국과 하원이 공산주의 영화라고 비난했고, 불똥이 튈까봐 헐리우드와 언론들도 재빨리 손절했다. 제작비 뒷조사를 하던 FBI는 촬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여주인공을 멕시코로 추방했다. 개봉도 순탄치 않았다. 극장들이 모두 손사래를 쳤고, 우익단체들의 보이콧이 들끓었다. 미국에서는 10년 동안 몇 번밖에 상영되지 못했다. 60년대 컬트 씬에서 서서히 호명되었던 희대의 문제작.

2022년 새해, <대지의 소금>을 문뜩 떠올린다. 험란한 제작 과정뿐만 아니라, 그 주제의식이 혼탁한 지금 이 시대에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촌스러운 프로파간다로 치부하지만, 주의깊게 보면 겹겹의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평등의 원칙을 찾기 위한 의지가 소금처럼 반짝거린다.

영화 대지의 소금(Salt of the earth, 1954) 스틸컷
영화 대지의 소금(Salt of the earth, 1954) 스틸컷

1951년의 실제 사건을 토대로 만든 이 영화는 뉴멕시코주 아연 광산에서 멕시코계 노동자들이 일으킨 파업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인종에 따라 임금과 근로조건이 확연히 달랐다.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는 백인 노동자와의 평등. 하지만 영화는 이 지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인종과 계급 문제에 더해, 여성 문제를 적극 끌어안는다. 법원이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를 금지하자 아내들이 대신 피켓을 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상수도 시설과 위생 문제도 중요하기 때문에 파업은 자신들의 몫이기도 하다는 것. 남자들은 아내들을 비웃는다.

- 우리 노동부터 평등해진 후에, 그 다음에 하자고.

가부장 남자들의 무시와 조롱. 여자들은 여봐란 듯이 체포와 투옥 속에서도 끝까지 피켓라인을 사수한다. 대신 남자들이 가사노동과 육아를 맡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가사노동이 얼마나 힘든지, 여자들 노동이 얼마나 무시됐는지, 왜 노동, 인종평등과 성평등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지. 히스패닉-백인 노동자와 여성들이 연대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한 사회의 변화는 모든 이의 존엄성과 평등이 기반이 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증언한다.

<대지의 소금>은 그렇게 '배제 없는 평등'이라는 귀한 교훈을 머금고 있다. '나중에'와 '사회적 합의' 같은 말들은 평등의 원칙을 위배하고 사회의 변화를 지연시키는 것으로 정치적-경제적 이득을 얻으려는 기득권의 치졸한 변명일 뿐이라는 교훈을 예시해주고 있다.

지난 12월 24일, 헌법재판소는 이주노동자의 '고용허가제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고용주에게 아무리 폭력을 당해도 노동 현장을 떠나려면 그 고용주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 강제노동과 인종차별을 최고 법기관이 아예 노골적으로 인증한 것이다.

하기는 차별금지법 하나 세우지 못하는 나라이지 않은가. 이제 해를 넘겼으니 무려 15년 동안 유령처럼 국회 안을 배회하고 있다. 두 인권활동가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와도, 수많은 사람들이 국회 농성장에서 차갑게 언 손을 불어가며 밤마다 촛불을 들어도, 국회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 와중에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물을 끼얹었던 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은 열심히 교회 목사들을 만나며 AI처럼 '사회적 합의'라는 말만 읊조리고 다닌다.

성별, 장애, 나이, 언어, 국적, 피부색, 종교, 사상,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학력, 병력...... '배제 없는 평등'.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그 평등의 원칙을 사회적으로 규약화하자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가 썩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소금 같은 약속일 것이다. 도대체 이 간단한 약속 하나 세우지 못하는 게 나라인가. 왜 존재하는 공화국인가.

영화 한 편 막겠다고 총 쏘고, 비행기 날리고, 뒷조사하고, 배우 잡아다 추방했던 게 후지다고 생각하는가. 법 하나 막아보겠다고 15년 동안이나 말 바꾸고, 모른 체 하고, 문자 테러하고, 혐오 광고를 쏟아내고, 민주당 정치인들과 극우 기독교인들이 뒤에서 서로 검은 악수를 교환하는 거나 대체 다른 게 무엇인가. 빌어먹을, 너무 투명하게 후진 기득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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