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아냐, 당신들이 아마추어야

  • 기사입력 2022.03.07 10:11
  • 최종수정 2022.03.07 10:12
  • 기자명 이송희일 영화감독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화제가 된 동영상. 검정색 외투를 입은 한 우크라이나 노파가 총으로 무장한 러시아의 젊은 군인에게 여기에서 뭐하고 있냐고 따져 묻는 순간을 담고 있었다. 군인이 머뭇거리자 이렇게 말했다.

"주머니에 해바라기 씨를 넣어둬라. 그러면 니가 죽은 뒤 우크라이나에서 해바라기가 자랄 것이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할머니의 그 말이 순식간에 기억 속을 관통하더니, 유년에 봤던 영화의 오프닝 장면을 자동으로 재생시켰다. 우크라이나 국기처럼, 파란 하늘 아래 대평원의 노오란 해바라기들이 바람에 흔들리던 그 장면.

이탈리아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가 말년에 만든 신파 멜로영화 <해바라기>(1970). 소련 현지에서 촬영된 최초의 서방 영화였는데, 국내에는 소련의 발전상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금지됐다가 1983년 이산가족찾기 운동에 맞춰 뒤늦게 선보였다. 2차 세계대전이 갈라놓은 한 부부의 슬픈 사랑 이야기. 남편은 징집돼 이탈리아에서 러시아로 떠나게 되고, 아내(소피아 로렌)는 전쟁이 끝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우크라이나까지 가게 된다.

해바라기가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소피아 로렌이 가로지르는 장면이 이 영화의 백미일 것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이 해바라기 밑에 군인들이 묻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1941년 독일과 소련의 치열한 공방전이 주로 벌어진 곳이 우크라이나였고, 수많은 군인들이 그곳에서 죽었다. 그 시체들 위로 해바라기가 자라 지금까지 파란 하늘을 인 채 하늘거리고 있다는 거였다.

스탈린과 히틀러에게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곡창 지대는 제국 확장을 위한 중요한 요충지였다. 1933년 소련의 집단농장화 정책으로 우크라이나인 수백만 명이 기근으로 사망했다. 뒤이어 1941년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나치는 그곳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아사시켰다. 스탈린과 히틀러 통치 기간, 유럽의 그 어느 곳보다 우크라이나인들이 가장 많이 죽었다. 지구상에서 해바라기를 가장 많이 심은 저 우크라이나의 너른 대지는 그렇게 비통의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었다. 1996년에도 우크라이나 핵미사일을 제거한 자리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미국 국방장관이 해바라기를 심기도 했었다.

1941년 나치 이후 81년 만에 침공당한 날, 우크라이나 할머니가 러시아 군인에게 해바라기 씨를 주머니에 넣어두라고 한 그 말은 이런 비극의 근대현사를 응축하고 있는 거였다. 침략에 대한 저주이면서 평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었던 것이다. 지금 전 세계인들이 해바라기를 들고 전쟁 중단과 평화를 외치고 있는 것도 그 할머니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터다.

그런데 희한하게 여기, 한국 정치인들만 별난 짓의 향연이다. 어찌나 황당한지 모골이 다 송연할 지경.

덩그라니 화난 표정의 '귤'을 SNS에 올려 놓은 윤석열 후보의 정신이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다. '오렌지 혁명'을 빗댄 오렌지도 아니고, 제주산 귤이다. 해바라기 대신 귤을 심으라는 얘긴가. 전쟁을 피하려면 국방력을 증강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도 터무니없다. 현재 한국 국방력은 전세계 6위. 작년에 수입보다 수출이 더 많아졌다. 오죽하면 이코노미스트지가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하겠다던 문재인 정부가 '남한 최고의 무기 판매상'이 됐다고 비꼬았겠는가.

민주당은 더 가관이다. 이재명 후보를 비롯해 박용진, 추미애, 박범계, 김홍걸 등이 일제히 '아마추어 초보 대통령을 잘못 뽑아서 전쟁이 났다'고 입을 모았다. 그 지지자들은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투표를 잘못해서 전쟁이 났다고 박수를 치며 화답했다.

맞을 짓을 해서 맞았다는 이야기다. 조선 왕이 아둔해서, 조선의 백성이 미련해서 일본이 점령했다는 이야기다. 상대 후보를 깎아내리기 위해 민주당이 그토록 싫어한다던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성껏 베껴 쓰는 이 찬란한 촌극이라니. 아무리 대선이 급하기로서니 타국의 비극을 연료 삼아 포격처럼 극성스럽게 쏘아대던 그 말들은 분명 평화가 아니라 인종차별의 언어들이다.

과연 유럽의 잘사는 나라에 전쟁이 나도 그런 소리를 했을까. 만만하고 깔봐도 될 것 같으니 대통령과 유권자들이 못나서 전쟁이 났다는 소리를 함부로 하는 것이다. 엄연한 주권 국가를 침략한 러시아 푸틴에게는 비겁하게 책임 한 번 묻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이 인종주의가 바로 노동이며, 차별이며, 한국 사회 곳곳에 불평등의 전쟁을 부추기는 두 거대 양당 정치인들의 정신 세계일 것이다.

저기 우크라이나의 평화도 걱정이지만, 여기 이 나라의 평화도 걱정이다. 연일 경쟁적으로 차별의 언어들을 쏟아내는 당신들이야말로 평화의 지독한 아마추어들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