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1894년 동학농민군의 꿈, 지금 여기의 ‘오래된 미래’

  • 기사입력 2022.03.22 16:48
  • 최종수정 2022.03.23 09:27
  • 기자명 박준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노동자들이 앞장섰던 노동운동은 아니다. 노동운동사는 아니라도 근현대 민중항쟁 가운데 노동자들이 알고 넘어가야 할 역사이다.

우리 근현대사를 돌아보았을 때 역사의 희망이 사라진 듯하고 역사적 낙관주의가 희미해져가는 절망의 상황에서 늘 ‘사건’이 터져 나왔다. 한 사건이 가라앉고나서 한 세대 30년이 넘기 전에 또 다시 전국규모의 민중항쟁이 이어서 일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 전국 규모로 일어난 민중항쟁, 사회변혁운동으로 꼽을 만한 사건은 일제 강점기 1919년 ‘3.1운동’, 해방후 1946년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 1960년 ‘4월혁명’, 1979년 ‘부마민중항쟁’, 1980년 ‘5.18 민중항쟁’, 1987년 ‘6월항쟁’과 ‘7.8.9노동자투쟁’그리고 2017년의 ‘촛불항쟁’이다.

2017년 2월 2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17차 촛불집회 사진. 
2017년 2월 2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17차 촛불집회 사진. 

2017년 촛불항쟁이 불붙기 전에 노동자들이 먼저 박근혜 퇴진 투쟁에 나섰다. 투쟁하면서도 박근혜 퇴진이 가능할까 확신하지 못했다. 촛불이 늘어나고 촛불항쟁이 불붙었으나 1987년 6월항쟁과 같은 ‘전민항쟁’으로 번질 것이라고 낙관하지는 못했다. 1987년에도 비슷했다. 전두환의 4.13호헌조치가 발표된 뒤 곳곳에서 관제 데모가 벌어졌다. 4.13호헌조치에 따라 광주학살의 주범들인 신군부의 집권은 마냥 계속 될 줄 알았다. 살아 있는 동안 과연 전두환 노태우가 감옥가는 꼴을 볼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그해 6월 10일 거리에 나섰던 대다수 시민 학생들은 자신들의 발걸음이 ‘6월항쟁’이라는 역사를 만들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1980년 5.18 민중항쟁 때도, 1960년 ‘4월혁명’ 때도, 1946년 ‘10월인민항쟁’ 때도, 1919년 ‘3.1운동’ 때도,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도 항쟁의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 들이 만들어 낼 ‘미래의 역사’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편 민중의 항쟁으로 이룬 성과를 독차지한 세력은 개혁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자신의 힘으로 수구 특권 기득권 세력을 제압할 힘이 없다면 민중의 힘을 빌어 개혁을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스스로가 기득권 세력의 일부가 된 ‘개혁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할 뿐 민중적 개혁을 추진할 의지도 실력도 없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근현대사는 자본주의가 정착되고 사회 모순이 심화되면서 국토와 체제의 분단 못지않게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양극화라는 내부 분단이 강화되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은 계속 파괴되었고 다양한 차별이 양산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기억해야 할 역사일 뿐 아니라 여전히 우리가 추구해야 할 꿈이 담겨 있는 ‘오래된 미래’이다.

서울 종로구의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서울 종로구의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밑으로부터 농민이 중심이 된 ‘민중’이 연합부대를 형성하여 조직체계를 갖추고,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한 뒤 서울까지 진격하여 권세가들을 몰아내겠다고 선언하고 일 년 내내 전국 곳곳에서 항쟁을 계속한 대규모 사회변혁운동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은 1월 고부봉기에서 고부 관아를 점령한 뒤 황토현 싸움에서 전라도 감영군과 싸워 승리하였고, 장성 황룡촌 싸움에서는 1811-12년 ‘홍경래난’이후 83년 만에 중앙에서 파견된 경군의 한 부대와 싸워 이겼다. 나아가 호남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인 전주성까지 점령하였다. 위로부터 근대개혁인 ‘갑오개혁’을 이끌어 내어 법적 형식적으로 신분제를 타파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농민들이 지방 권력을 장악하거나 지방 행정에 참여하여 자치 질서에 영향을 미친 ‘도소-집강소 시기’를 만들어보았다. 뿐만 아니라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비록 동학농민군을 ‘적’으로 여겼으나 농민군이 서로 차별없이 평등한 관계를 실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려준다.

“적은 서로 대하는 예가 매우 공손하였으며 신분의 귀천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평등한 예로 대하였다. 비록 접주라고 불리는 사람 중에서 남보다 뒤처지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적들은 정성껏 섬겼다”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대뫼마을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대뫼마을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충청도의 동학농민군의 중간 지도자였던 홍종식은 투쟁의 과정에서 경험했던 농민군의 수평적 관계와 생존권 실현을 이렇게 증언했다.

“이 때에 있어서 제일 인심을 끈 것은 커다란 주의나 목적보다도 또는 조화나 장래의 영광보다도 당장의 실익 그것이었습니다. 첫째, 입도만 하면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주의 하에서 상하.귀천.남여.존비 할 것 없이 꼭꼭 맞절을 하고 경어를 쓰며 서로 존경하는 데서 모두 심열성복이 되었고, 둘째, 죽이고 밥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도인이면 서로 도와주고 서로 먹으라는 데서 모두 집안 식구같이 일심단결이 되었습니다. 그때야말로 참말 천국천민들이었지요.”

1894년 동학농민군은 침략자 일본군, 친일 개화파 정권의 정부군, 보수 유생 토호 세력에 의해 몇 만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패배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는 실패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생존권이 문제가 되어 ‘밥이 하늘’이라고 외쳐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하.귀천.남여.존비의 차별은 모양을 달리해서 재생산되고 있다. ‘사람이 하늘’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의 자존과 존엄이 짓밟히는 사회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꿈꾸었던 ‘밥과 사람이 중심인 세상’은 지금 여기서도 버릴 수 없는 ‘오래된 미래’이다. 그러한 동학농민군이 꿈꾸었던 세상은 사람보다 돈이 중심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는 아니었으며, 현실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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