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꿀벌의 실종은 예언이다

  • 기사입력 2022.04.07 17:32
  • 최종수정 2022.04.07 17:34
  • 기자명 이송희일 영화감독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 전국에서 100억 마리의 꿀벌이 감쪽같이 실종됐다.

2010년 감염병으로 토종벌 60% 이상이 폐사한 후 12년만에 다시 꿀벌이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 전국 양봉 농가들은 텅 빈 벌통 앞에서 망연자실했고 언론과 전문가들이 요란스레 온갖 가설들을 제출한다. 말벌, 살충제, 응애, 이상 기온, 장마 등 온갖 범인들이 지목됐지만, 단일 원인이 아니라 복합적 요소가 뒤섞여 있다는 두루뭉술한 진단이 대체적이다.

2006년 꿀벌이 돌아오지 않는 '군집 붕괴 현상'이 처음 보고됐을 때도 그랬다. 원인을 특정하지 못하고 미스터리로만 소비됐다. 미국의 Dave Hackenberg라는 농부가 꿀벌 군집이 붕괴됐다고 세상에 알렸는데, 순식간에 487개의 국내외 언론에 이 소식이 타전됐다. 그 덕에 세계 각지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꿀벌이 실종되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당황했고, '꿀벌이 사라지면 4년 안에 인간도 사라진다'는 출처 미상의 아인슈타인의 말이 온 세상에 퍼져나갔다.

꿀벌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2009년 <꿀벌의 실종 Vanishing of the Bees>이라는 다큐 한 편이 세상에 선보였다. 한 벌통의 꿀벌들은 하루 동안 10만 송이의 꽃을 날아다닌다는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이 다큐는 처음으로 군집 붕괴 현상을 알린 Dave에서부터 전 세계 양봉업자들, 과학자들, 농부들과 생태학자들의 인터뷰를 부지런히 횡단하며 실종 원인을 추적한다.

여러 가설들을 검토한 끝에 이 다큐가 내놓는 중요한 단서는 '단작 시스템'. 작물을 골고루 재배하는 게 아니라 밀이나 대두처럼 한 가지 단일 작물만을 재배하는 농법. 2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가 급발진을 하고 농업도 공장화됐다. 단일 작물을 심는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경운 농법, 화학 비료, 그리고 살충제 사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됐다.

아몬드를 보자. 전 세계 아몬드의 80%를 생산하는 미국 서부. 아몬드 열매는 100% 꿀벌 수분으로 열리는데, 꽃이 필 무렵 미국 전역에서 꿀벌들이 실려온다. 간혹 호주에서도 동면된 채 수입해온다. 이렇게 실려온 꿀벌들은 계절이 맞지 않는데도 수분 노동을 위해 억지로 잠에서 깨워진다. 2013년, 이 지역에서 꿀벌들이 대량 폐사했다. 2019년에는 500억 마리가 떼죽음을 당했다. 살충제와 약해진 면역력 때문이다. 이렇게 수분 노동을 하다 죽는 꿀벌들이 미국 전체의 1/3 가량. 매년 도축되는 동물과 물고기 수보다 훨씬 많은 꿀벌들이 죽어나간다.

현재 미국 농작물의 95%에 이렇게 살충제를 뿌린다. 그러면 한국은? 사용량이 미국보다 5배 가량 더 높다. 압도적인 세계 최고다. 한편, EU집행위는 2020년 꿀벌에 치명적인 네오니코티노이드 계열 살충제의 전면 금지를 결의하기도 했다.

꿀벌 실종을 둘러싼 온갖 말풍선들이 조용히 누락시키는 것, 단작 시스템의 폐해. 단작 농법은 탄소를 저장하는 토양의 힘을 훼손하는 대신에 화학 비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질병에 취약해진 작물에 살충제를 뿌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비료와 살충제는 석유와 천연가스에서 추출된다. 상업화된 단작 농법은 기후위기를 가속하고 서식지 파괴와 함께 생물다양성을 감소시킨다. 꿀벌뿐 아니라 수많은 곤충들이 면역력 저하와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사라지고 있다. 매년 곤충의 2.5%가 소멸한다. 설상가상, 추웠다 더웠다 기후 혼돈과 계절의 붕괴가 이미 취약해진 꽃가루 전령사들의 날개를 꺾고 있는 것이다.

유럽과 미국에선 30%, 남아프리카에선 29%, 중국에선 13% 가량의 꿀벌들이 매년 사라지고 있다. 야생 꿀벌의 1/4이 1990년대 이후로 관찰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토마토와 블루베리를 수분하는 땅벌도 기후 혼돈 속에서 이미 멸종되고 있다. 요컨대 꿀벌은 갑자기 실종된 게 아니라, 서서히 교사되고 있는 것이다. '단작 농법'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체제와 그로 인한 기후위기로 인해.

생태계 회복과 농법의 변화, 그것은 기후위기에 대한 슬기로운 대응이기도 하지만 꿀벌의 삶의 지속을 보증하는 유력한 해법이기도 하다. 응애와 진드기 방제 같은 위험한 미봉책 너머를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큐 <꿀벌의 실종>의 끄트머리에 인용된 아인슈타인의 이 문장은 정곡을 찌른다. "우리는 문제를 일으켰던 그 사고방식으로 그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인식론적 단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사실 꿀벌의 실종보다, 꿀벌이 없으면 농작물의 70%가 수분되지 못한다는 불길한 통계보다 더 괴이한 건 꿀벌이 왜 사라지는지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과 생태적 성찰을 도통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응애는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주류 언론들이 생태계와 농촌 회복, 농법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그 어느 정치인이 꿀벌의 실종을 정치 의제로 끌어안은 걸 본 적이 있는가. 윤석열 대통령인수위의 그 잘난 위원들 중에 단 한 명의 농업계 인사가 없다. 꿀벌도 실종됐지만, 농부도 실종됐다. 물론 농촌도 사라지고 있다. 촘촘히 연결된 이 세계에서 단일 개체만 사라지는 사건 따위는 결코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 꿀벌은 예언자였다. 사원에 생긴 벌집은 상서로운 징조였다. 여왕벌 중심의 모권 사회가 어머니 자연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 여긴 탓이다. 꿀벌의 실종은 과연 무엇을 예언하는 걸까.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다. 단지 말하지 않을 뿐이다. 난 이 침묵과 사유의 실종이 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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