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박준성의 노동자역사] 1929년 원산총파업

  • 기사입력 2022.06.23 13:18
  • 최종수정 2022.06.23 13:26
  • 기자명 박준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1929년 1월부터 4월까지 원산지역 3천 여명의 노동자들이 80여일 동안 파업을 했다. 원산총파업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노동운동의 물길을 가르는 식민지 강점기의 가장 큰 파업투쟁이었다.

원산시가와 원산항
원산시가와 원산항

1928년 9월 7일, 원산 가까이 있는 영국계 석유회사 라이징 선의 문평제유공장에서 악질 일본인 현장 감독 고다마가 조선인 노동자 박준업을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문평제유공장은 일본 고오베에 있는 총지점을 거쳐 들어오는 각종 석유를 정유하여 조선 각지와 만주.간도에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제유공장 노동자들은 '감독 파면'과 '최저임금제·해고수당제 실시'를 요구하며 투쟁에 나섰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원산노동동조합연합회(원산노련)에 가입하였다. 9월 28일 원산노련과 회사측은 일본인 감독을 파면하고 파업 중 임금의 4할을 회사측이 부담하며, 퇴직금 재해 위자료는 3개월 이내에 결정하고 최저임금의 한도는 3개월 이내에 쌍방의 타협으로 결정한다고 협약을 체결하였다. 석 달 뒤인 12월 28일 원산노련은 회사측에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회사 쪽은 "모든 노동단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직공과 직접 해결한다"는 구실로 요구를 거절했다.

1929년 1월14일 문평석유공장 노동자 300여 명은 최저임금제 확립, 8시간 노동제 실시, 단체계약권 수용, 지배인 파면 등의 요구를 내걸고 다시 파업에 들어갔다. 원산노련 소속 노동자들은 문평제유회사의 화물을 취급하지 않는다고 결의하여 파업에 동조하였다. 회사측은 해고선언으로 맞섰다. 일본인 운송업자들과 원산상업회의소는 노련의 회원은 사용하지 않겠다고 통보하였다. 1월 23일 원산지역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들어갔다. 투쟁의 선봉에는 노동자 현장 조직인 규찰대가 있었다. 규찰대는 고용주들의 노동자 모집을 저지하고, 일제 경찰과 깡패 조직에 맞서 파업을 수호하는 선진노동자 조직이었다.

원산노련 깃발과 파업하는 노동자들
원산노련 깃발과 파업하는 노동자들

총파업 직후인 24일 일본군 제 19사단 함흥보병대 73, 74연대 300명과 400명의 재향군인, 1,000여명의 소방 대원이 ‘내한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시가를 행진하였다.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파업을 약화하려는 의도였다. 원산 헌병대는 원산 쟁의 전 과정에 관여하였다.

원산노련은 파업이 장기화 될 것에 대비하여 비축하였던 기금으로 3개월 분의 식량을 주문했다. 파업 자금을 모으려고 원산의 노동자들은 "한잔의 술 한 개피의 담배, 한 푼의 낭비도 반동"이라며 1일 2식과 금연 금주운동을 벌였다. 그렇게 모은 파업기금이 1만2천 원. 당시 쌀 한 가마에 5원 정도였으니 쌀 2천 4백여 가마분의 기금을 모은 것이다.

원산노련이 총파업을 벌인 이후 다른 지역의 노조와 농민조합, 기타 사회단체들이 격려문과 투쟁자금을 보내왔다. 중국, 프랑스,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동자들도 격려 전문을 보내왔다. 원산 주변의 농민들은 1000단이 넘는 땔나무를 제공하였다. 임시로 원산 부두작업에 종사하던 일본인 들도 작업을 중지하고 파업에 동조하였다. 일본에 있는 고오베 라이징 선 석유회사의 일본인 노동자들과 북해도 노동자들은 동정파업을 벌였다.

1월 29일 표면상으로 불간섭을 표명해 온 일제 경찰이 소비조합의 장부를 압수하였으며, 2월 2일 새벽에는 단위 조합을 수색하고 문서를 압수하였다. 경찰 50명이 증원되어 규찰대원들을 폭행과 협박 혐으로 검거하였다. 2월 7일까지 일제에 의해 원산노련 위원장 김경식을 비롯한 20여 명이 수감 되었으며 20일까지 37명, 2월 말까지 42명이 검거되었다.

경찰의 개입과 탄압이 확대되면서 자본가들은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를 해고하고, 실업노동자를 모집하고, 인천 등 다른 지역에서 노동자를 데려와 파업의 힘을 빼려고 했다. 깡패집단인 국수회, 일본 청년단을 끌어들여 만든 '위력단'이라는 폭력조직을 동원하였다.

원산노련의 핵심 간부들이 잡혀 들어간 뒤 진상을 조사하려고 원산에 와 있던 변호사 김태영이 위원장 대리를 맡았다. 김태영은 온건 합법을 표방하면서 2월 19일에는 간부들과 함께 각 관청을 방문하여 쟁의의 조정을 요청하였다. 동정을 바라는 구걸 행위를 자행하였다. 3월 7일에는 김태영을 비롯한 노련의 신임 간부들이 강령과 마크를 고치고 “노동 운동의 통일과 무산자의 세계적 제휴를 도모하며 무산 계급의 해방을 기한다”는 강령을 “생활 향상을 위한 노동자의 수양을 본위로”하는 노자 협조주의적인 것으로 수정하였다. 또한 함남지사나 경찰부장에게 원만한 해결을 탄원하는 굴욕적이고 비주체적인 자세를 보였다. 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력을 약화시키고 연대 투쟁을 가로막는 반 노동자적 행위였다.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에 맞서 자본가들은 비밀리에 원산노련에 대항하는 어용 함남노동회를 만들고 농한기에 원산으로 몰려온 자유노동자 400여 명을 확보하였다.

4월 1일 무장경관 수백 명이 총동원된 계엄 상태에서 노동자 들이 함남노동회 사무실과 간부 회원들을 습격하였다. 파업을 폭력적으로 깰 명분을 삼으려는 일제와 고용주들의 공모로 보이는 행위였다. 일제의 무장 경관과 기마 헌병이 증파되어 노동자들을 닥치는 대로 검거하면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자본가 진영에서는 함흥노동회를 경유하지 않으면 고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원산의 고주회에서는 노련 탈퇴를 고용조건으로 하겠다는 의견서를 발표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원산노련에서 탈퇴하여 함남노동회에 가입하거나 혹은 전업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났다. 5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실업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원산노련은 4월 6일 전체 집행위원 30명 중 11명이 참석하여 집행위원회를 열고 각 세포 단체에 자유 복업 명령을 내렸다. 4월 21일에는 노련의 사무실과 소비조합이 폐쇄되었다. 총파업은 결국 노련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노련이 파괴된 후 위원장 대리 김태영은 경성으로 떠나버렸다.

원산노동연합회회관
원산노동연합회회관

원산총파업에 대응하는 일제의 자본과 권력은 제국주의 전쟁을 눈앞에 두고 전략적 필요에 의해 원산노련을 압살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일관되게 목표를 실행해 나갔다. 반면 노련의 지도부는 이에 대한 의식 없이 타협과 조정에 의한 합법적 투쟁에만 의존함으로써 파업을 올바르게 이끌지 못하였다.

지도부가 개량적이고 타협적으로 파업을 이끌었음에도 원산총파업이 80여일 동안 지속될 수 있던 힘은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감과 단결력과 컸기 때문이다. 특히 지도부가 패배주의에 빠졌을 때도 선진 노동자들로 구성된 규찰대는 비타협의 투쟁정신으로 끝까지 싸웠다. 강고하게 투쟁하는 현장의 선진 노동자 조직이 필요하다는 사례를 만들었다.

노동자의 생존과 노동조건의 개선, 인간다운 삶을 위한 노동자들의 파업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통치 기구, 일본인 자본가들과 언론 단체의 연합에 의해 저지되고 파괴되었다. 투쟁과 패배를 통하여 노동자들도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는 민족 해방에 나서야 한다는 책무를 인식하였다. 더불어 노동자들의 조직과 파업이 민족해방운동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힘이라는 사실을 체험했다.

3천여 명에 가까운 원산지역의 노동자들이 80여일 동안 파업을 지속한 것처럼 전국 노동자 밀집지역 곳곳에서 전체 노동자들이 동시에 장기파업을 전개한다면 노동해방과 민족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일깨웠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1930년대 전국 수준의 산별 노조 건설과 혁명적 전위당 건설을 위한 비합법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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