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을밀대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체공녀’ 강주룡

  • 기사입력 2022.07.22 13:54
  • 최종수정 2022.07.22 17:10
  • 기자명 박준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1931년 5월 29일 새벽,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고공농성을 벌였다. 지금까지 알고 있기로는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고공농성 1인 시위였다. 주인공은 평양의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의 지도자 강주룡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강주룡을 ‘아직 조선 노동운동 선상에서 보지 못하던 새 전술’을 벌인 ‘체공녀’로 불렀다.

식민지 시기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같은 시간 일을 하고도 조선인 남성 노동자들에 비해 2분의 1, 일본인 남성노동자들에 비해서는 4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고무공장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이나 노동조건은 더 형편없었다.

1930년대 고무신발공장 노동자들
1930년대 고무신발공장 노동자들

1931년 5월 평원고무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평양의 고무공업동업회에 속한 다른 12개 고무공장에서도 평원고무공장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임금을 깎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은 12일 동안 죽자사자 싸웠다. 회사는 새 직공을 모집하여 트럭에 싣고 뒷문으로 몰래 들여와 공장을 돌리려고 했다. 노동자들은 억수로 퍼붓는 비를 맞으며 트럭 밑으로 들어가 진흙탕 속을 뒹굴면서 진입을 막아냈다. 회사는 임금을 깍지 말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투쟁의 강도를 높였다. 굶어 죽기로 싸우겠다며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회사에서는 노동자 49명 전원을 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노동자들은 흔들리지 않고 단식투쟁을 단행하였다. 조선인 사장이 한밤중에 일본인 경찰을 끌어들여 노동자들을 강제로 공장 밖으로 쫓아냈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선배이자 간부였던 강주룡은 광목을 한 필 사 가지고 어둔 밤 비탈진 길을 올라 평양 근교에 있는 을밀대 가까이로 갔다.

평양 을밀대 원경
평양 을밀대 원경

목을 매달아 죽을 각오였다. 자칫 흩어질 수 있는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투쟁을 이어나가도록 격려하고, 평원공장의 횡포와 자신들의 싸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작심했다. 을밀대로 가기 전에 아버지께 “불초여식은 소원이 성취되면 다시 뵙겠으나 그렇지 아니하면 훗날 땅속에서 뵙겠습니다.”라는 유언 같은 편지도 남겼다. 을밀대 아래서 자살할 작정으로 사가지고 간 광목을 쪼개서 이어 묶었다. 한쪽에 돌멩이를 매달고 지붕 한 귀퉁이로 집어 넘겼다. 밧줄처럼 타고 을밀대에 올랐다. 오싹오싹 떨리는 추위와 쏟아지는 잠을 견디며 새벽을 기다렸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소식을 들은 노동자들과 평양의 활동가들도 찾아왔다.

을밀대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는 강주룡
을밀대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는 강주룡

강주룡은 을밀대 꼭대기에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펑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하고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또한 자신들의 임금감하 저지 투쟁이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렸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300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깍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둥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우리 노동운동사에 던져 준 한 줄기 빛과 같은 소중한 ‘선언’이었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은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임금을 깎으려는데 맞서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싸움의 결과는 평양의 2300명 다른 고무신발공장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될 판이었다. 자신을 위한 싸움이 자신만을 위한 싸움에서 그치지 않았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강주룡 혼자만 영웅적으로 싸운 것은 아니었다. ‘강주룡’ 이름 밑에는 함께 치열하게 싸웠던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이름이 담겨져 있다.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과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졌기 때문에 요구했던 임금인하를 막아낼 수 있었다. 평양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와 연대의식을 고취했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투쟁과 강주룡의 고공농성에서 보듯이 노동운동의 역사에는 자신을 위한 싸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측면이 노동운동을 지탱해 온 빛이라면 반대편에는 돈벌레가 되어 자신과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대다수의 생존과 삶을 짓밟는 그림자도 있었다.

.'평양적색노조사건' 연루자, 왼쪽 맨아래가 강주룡
.'평양적색노조사건' 연루자, 왼쪽 맨아래가 강주룡

강주룡은 평양혁명적노동조합에 참여했던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비타협적인 옥중투쟁 끝에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이 심해져 1년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잠시 나아지는 듯했으나 병이 다시 도졌다. 그도 동무들도 치료비와 입원비가 없었다. 두 달여 시름시름 앓다가 1932년 8월 13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숨졌다.

강주룡은 길지 않은 서른 두 살 생애를 자본과 타협하지 않으며 원칙대로 꼿꼿하게 살았다. 자신만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이해를 실현하려고 앞장섰다. 박서련 작가는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한겨레출판)으로 강주룡을 다시 지금 이곳으로 불러냈고, 일본에서 번역도 되었다.

강주룡의 삶과 투쟁, 뜻과 정신은 지금도 절박한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역사적 지지자이자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거듭 되살아나곤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엇이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삶인지도 모르고,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보지도 못 하고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보람과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거울이 되었다.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과 일본어 번역본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과 일본어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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