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당신의 '라떼'가 궁금합니다

  • 기사입력 2022.08.11 19:12
  • 최종수정 2022.09.13 10:38
  • 기자명 명인 인권교육연구소 너머 대표
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라떼’는 “나 때는 말이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기성세대를 희화화하는 표현이다. 젊은이들이 살아가야 할 현재를 더 어렵고 각박하게 만들어놓은 건 정작 기성세대들이면서, 자신의 과거 경험을 일반화해서 자기보다 지위가 낮거나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꼰대질’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요즘 우리 부부는 자주 서로의 ‘라떼’를 묻는다. “당신의 일곱 살은 어땠어?”, “당신이 옥인동에 살 때 얘기 좀 해봐.” 하는 식이다. 작년에 옆지기의 낙상 사고로 우리가 더 이상 건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절절한 실감, 건강하지 않다는 것이 일상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어떤 상태를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경험을 한 뒤부터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잘 돌보고 잘 기댄다는 것이 끊임없이 배우고 연습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만일 당신이 치매에 걸린다면, 당신은 어디에서 누가 돌봐줬으면 좋겠어?”

“치매는 한자로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뜻이잖아. 우리는 먼저 그 생각부터 바꿔야할 것 같아.”

장애란 치료되기 어려운 정신이나 신체의 손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에게 불리함을 주는 장벽들, 즉 사회가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리석고 미련한 것은 장애를 겪는 사람이 아니라 장벽을 만든 사회인 셈. 그런데 왜 인권을 떠들어 온 나조차 늙어서 겪는 인지장애는 다르게 여기고 있었을까?

돌아가시기 전까지 인지장애를 겪던 할머니 생각났다. 할머니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런데 어쩌다 문병 오는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날 때부터 할머니랑 같이 살았던 나에겐 익숙한 지명이나 이름이 들릴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할머니가 결혼 전에 살던 친정과 상관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때 할머니는 열일곱 살 이전에 살고 계신 게 아니었을까? 할머니를 작은 엄마가 잠깐 보살피고 있던 시절, 작은 엄마는 씻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할머니 때문에 자주 고통을 겪었다. 할머니가 욕까지 하면서 거칠게 저항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어쩌다 내가 씻자고 하면 할머니는 순한 양이 되었다.

옆지기가 다쳤을 때, 나 말고는 누구에게도 대소변 처리를 맡기기 어려워하는 걸 보면서 그때 생각이 났다. 그때, 할머니가 싫어한 것은 씻는 게 아니었구나. 한 번도 같이 살았던 적이 없어서 낯설 수밖에 없던 작은 엄마에게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 그토록 힘들었던 거구나. 인지장애를 겪는 노인이 ‘수치심’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완전히 무시했던 건 바로 우리였던 거구나. 그런 생각 끝이었다. 당신의 ‘라떼’가 궁금해진 것이. “만일 당신에게 인지장애가 온다면, 나는 당신이 어느 시기·어디쯤에 있는지를 좀 더 많이 알고싶어.”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소득이 있었다. 평소 이해되지 않던 상대방의 사고방식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될 때가 있고, 평소 이해되지 않던 상대방의 습관을 더 이상 미워할 수 없게 될 때가 있다. 그리고 때때로 미처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경이. 당신의 눈동자에 반짝이는 열두 살, 당신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스물두 살. 그리고 문득, 내 앞에 마주앉은 아주 ‘낯선’ 당신.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자라거나 나이 들어간다는 건, 성장 혹은 퇴화하거나 혹은 성숙했단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변화하고 있는 중인 서로를 만나는 일이다. 우리 부부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서로의 과거를 ‘궁금해 하기’ 시작했고, 뜻밖에 그것은 현재의 서로를 ‘다시 보는’ 일이었다. 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존중은 곧 ‘re(다시)-spect(보기)’다.

해러웨이의 말대로 ‘인생은 취약성의 기간’이고,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기를 돌봄이 필요한 상태로 살아간다. 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뿐 아니라 돌보는 사람에게도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이 사회가 돌봄을 중심으로 전환하는 게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어쩌면 그 시작은, 우리가 진심으로 서로를 ‘궁금해’하고 ‘다시 봄’으로써 타인을 새롭게 만나는 연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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