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건설노조는 하나의 큰 빛이었어요”

건설노조 선배로부터 듣는 토목건축분과 임단협 쟁취 투쟁
대전세종건설지부 강석관 분회장 인터뷰

  • 기사입력 2022.08.22 16:38
  • 기자명 이준혁 기자

건설노조는 건설 현장을 바꿔가고 있다. 지난 2018년 토목건축분과위원회가 쟁취해낸 전국 단위 중앙 임금 및 단체협약도 그 일환이다. 이에 앞서 2006년 대구경북 지역에서 32일간 총파업을 통해 최초로 지역 단위 임단협을 쟁취한 바 있다. 임단협을 쟁취하면서 토목건축노동자들은 ‘노가다’에서 ‘노동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임단협. 그러나 그 쟁취까지는 수많은 고초가 있었다. 그중 하나인 대전 지역에서 팀장에서부터 지부 간부까지, 오랫동안 활동해온 동지를 만나 그 과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지금은 대전세종건설지부 중급(중소규모 사업장) 형틀 3분회장을 맡고 있는 강석관 동지다.
(본 기사는 건설노조 기관지 <건설노동자> 49호에 함께 실렸습니다.)

Q.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민주노총 건설노조 대전세종건설지부 중급 형틀 3분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건설노조 가입은 2006년부터인가 했었고, 2010년 들어와서는 부지부장도 했었습니다.

Q. 건설 현장에서는 언제부터 일하셨나요

처음 시작한 건 1979년입니다. 목포에서 일하다 89년 대전에 와서 형틀 목수 일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대전에 왔을 때만 해도 그렇게 일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객지로 다니는 경우가 많았죠. 가정은 대전에 꾸려놨지만요.

Q. 건설노조에 가입하기 이전에는 어떠셨나요

몸도 마음도 엄청 힘들었어요. 그때는 아침에 출근하면 저녁 해지고 나서 퇴근했죠. 그리고 철새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기 바빴죠. 여기서 일하다 잘 안 맞으면 다른 데로 가고, 단종에서 나가라고 하면 보따리 싸들고 또 나가고요.

사실 처음 대전에 정착하면서 객지 생활 안 할 거라고, 가족들과 단단히 약속을 했었죠. 그런데도 계속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는 아는 인맥으로 들어가니까요. 한 번 나가서 일하면 그 이후로도 계속 객지로만 연결이 되는 거죠.

객지 생활하다 보면 할 게 없어요. 작업 시간 외에는 술 먹는 거 말고 더 있나요. 그러니 팀장한테 돈 받아도 그 돈을 성하게 집에 가져다주지도 못했죠. 집에서는 아이들 데리고 있는 가족들이 또 고생도 많이 했고요. 그러다 민주노총 건설노조 하면서 대전에 잘 정착도 하게 됐죠. 그래서 노동조합만 바라보면 자부심이 생겨요.

Q. 건설노조에는 어떻게 가입하게 되셨나요

2006년이었죠. 제가 있던 현장에서 다른 한 도급 팀장이 3달 치 돈을 받아서 도주해버렸죠. 돈 들고 도망간 놈이 다시 가지고 오겠냐 싶었죠. 근데 3일 만에 돈을 다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이미 팀장한테 돈이 나갔는데 어떻게 해결했나 싶어 물어보니 원청에 일당을 선지급을 하도록 노동조합에서 해결해 줬다는 거에요. 이걸 보니 정말 노동조합이 있어야겠구나 싶었죠.

그때 건설노조에서 당시 저 포함한 팀장들 만나자는 요청이 있었어요. 만나 보니 그 체불 건 얘기하면서 다 못한다고 했는데 노동조합에서 해결했다, 건설노조 같이 하면 이보다 더 큰 것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팀원들 다 설득해서 건설노조에 가입했죠. 그때 제 인생에 뭔가 큰 하나의 빛이 내려온 것 같았어요.

Q. 건설노조 가입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기억에 남는 투쟁이라면 2008년 대전 서남부권 총파업 투쟁입니다. 그 당시 18개 현장에 도급팀들 위주로 총파업을 했어요. 1평(회베)당 단가 3천 원 인상, 근로시간 8시간 두 가지만 가지고 싸웠습니다. 사실 그 전 2006년, 대구경북에서 총파업 투쟁할 때 직접 가서 봤었어요. 그걸 보면서 우리도 한 번 해보자 해서 2년 동안 준비한 거였죠.

그 당시 시청광장에 모이기로 했었는데요. 몇 사람이나 오겠냐, 반신반의하면서 나가보니 정말 새카맣게 사람들이 모여있더라고요. 진짜 되겠구나, 대경만 아니라 우리 대전도 되겠구나, 자부심이 느껴졌죠.

그러고 나서 투쟁은 승리했죠. 근데 유명무실하게 돼버렸습니다. 투쟁을 준비하면서부터 여기서 얻은 성과는 모두 우리 조합원들한테, 팀원들한테 돌려주자고 합의하고 시작했었죠. 그런데 팀장들이 단가 인상분을 전부 자기가 다 챙기고 안 줘버린 겁니다. 당시 저 포함한 3개 분회장(팀장)만 줬었죠. 그러니 조합원들이 실망해서 한 번에 쫙 빠져버렸습니다. 그 당시 지부 조합원이 400명이었는데, 그 400명 치 피를 빨아서 도급 팀장들 배 불려주고 끝나버린 거죠. 그때 아픔을 생각하면 지금도 뭔가 짠한 느낌이 듭니다.

Q. 조직이 큰 어려움을 딛고 직고용 쟁취 투쟁에 나섰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5년 동안 직고용 팀을 만들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2008년 일이 없었다면 바로 직고용으로 갈 수도 있었겠지만, 아쉬운 마음 털고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을 빨리 찾자고 하면서 5년 동안 준비한 거죠.

첫 직고용 팀이 들어갔던 게 2013년입니다. 그때는 우리 노조가 일하게 해달라는 것 말고는 아무 조건도 없었죠. 작업시간 8시간 같은 것도 1년 뒤에나 시행할 수 있었어요. 처음에 딱 6명이 들어갔는데, 들어가서도 도급 팀들 틈바구니에서 허드렛일만 했습니다. 일을 안 시키더라고요. 당신들은 놀아도 돈 주니까 말썽 피우지나 말고 가만있다 가라는 식이었죠. 우리는 도둑놈 아니다, 일하러 왔다고 현장 소장한테 따지니 그제서야 저기 구석에 가서 바라시(해체)나 하라고 했었죠.

Q. 직고용 팀을 만들면서 지역 단협을 만들어낸 것이군요

그러다 우리가 팀을 10개 정도 만들어내니까, 이제 업체들과 싸울 수 있는 힘이 생겼죠. 여기에 대구경북이나 광주 등 지역에서도 조직해서 올라오는 힘이 더해졌죠. 그때부터 지역 철근콘크리트협회와 교섭할 수 있는 힘이 생겼죠. 철콘업체들을 모아서 교섭 창구를 만들었죠. 이때부터 정말로 정상적인 단협이라는 체계를 만들게 된 거죠. 건설노조 중앙에서 일정한 내용이 내려왔고, 그걸 우리 지역에 맞게끔 수정을 해서, 철콘업체하고 협회하고 같이 도장을 찍었었죠.

Q. 그러한 지역 단협들을 기반으로 2018년 중앙임단협을 쟁취하게 됩니다. 중앙임단협 쟁취 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2014년인가부터 중앙임단협을 하자고 이야기가 나왔죠. 전국 임금 맞추는 게 큰 문제라고 하더라고요. 특히 철근 같은 경우는 당시 부산울산경남이나 대구경북보다 우리가 더 일당이 높았거든요. 대전은 맨 처음 시작하면서 형틀, 철근 같이 하다보니 그랬죠. 그리고 세종행정도시 공사가 시작되면서 대전에서 다 넘어갔죠. 넘어가야 하니 1~2만 원 더 주고, 그게 일당으로 굳어버린 거죠. 그러다 보니 우리를 따라오기 힘들어하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올려버리면 다른 지역 사람들 다리가 찢어지니까. 반대로 형틀은 우리가 낮았고요. 그래서 맞추자, 이런 얘기가 나왔죠. 이래서 철근 같은 경우는 동결도 하고 그랬어요.

Q. 중앙임단협을 쟁취하고 어느새 5년이 흘렀습니다. 그 이후 좋아진 점이 있다면요

중앙임단협을 하고 나서 여러 점이 좋아졌지만, 무엇보다 현장 교섭이 편해졌습니다. 교섭 자리에서 우리가 단협 상의 권리나 이래저래 보장받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회사 쪽에서 자기들이 생각하기에는 의아하다고 하거든요. 그렇게 하면 우리 죽으라는 얘기밖에 안 된다고 앓는 소리도 하곤 합니다. 그러면 또 우리는 협조 요청드린다고 하고 얘기하고 빠지고 이런 걸 한두 달 끌기도 하는데요. 근데 중앙임단협을 해놓으니까 사측도 이제 어느 정도는 다 숙지를 하더라고요. 그러니 얘기를 하기가 편해지죠.

Q. 전국의 건설노조 동지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우리 민주노총 건설노조에 들어와서 후회하시는 분들 거의 없으실 거에요. 다만 아쉬운 건 건설 현장 가서 보면 비조합원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이분들한테 노조 들어오면 공휴일에 유급으로 쉬고 또 명절, 여름휴가 혜택 있고 토요일 3시간 단축도 되고, 이런 설명을 많이 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알겠다며 가입을 하시는데요. 가슴 아픈 건 말씀을 드리려해도 노동조합이 무슨 폭력 집단이라고 생각을 하시고 대화조차 안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우리 건설노조가 비조합원들한테도 잘 다가가고,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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