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과 이재유(1903-1944)

  • 기사입력 2022.08.23 13:50
  • 최종수정 2022.08.23 13:55
  • 기자명 박준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예전에 학생들이 안중근과 유관순을 모른다고 시끌벅적한 적이 있다. 목소리 높여 꾸짖는 사람들에게 왜 알아야 하는지 묻고, 열 받는 당신들은 얼마나 잘 아는지 알려달라고 하고 싶었다. 강주룡이나 이재유는 아냐고 되물으면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했다. 이재유는 일제 식민지 시기 ‘당대 최고의 혁명가’, ‘19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라는 표현처럼 굽히지 않는 사회주의 혁명가였으며, 손꼽히는 혁명적노동조합운동의 지도자였다. 18년 동안 사회주의운동에 앞장섰으며, 세 차례 일제의 감옥에 갇혀 12년 동안 전향하지 않고 끈질기게 옥중투쟁을 벌였다. <이재유 탈출기>를 쓴 금강산인은 이재유를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혁명투사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재유를 ‘반드시’, ‘꼭’ 알아야 하고 모르면 ‘절대로’ 안되는 인물이라고 강변하고 싶지는 않다.

1920년대 노동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발판으로 삼고 1930년대 노동자들의 계속되는 투쟁을 동력으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일어났다. 기업별 노동조합을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바꾸고, 생존권 투쟁은 물론 민족해방과 사회주의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운동이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이끌어 갔던 사람들은 그때까지 전향하지 않고 활동하던 1920년대 사회주의자, 코민테른과 이어져 국외에서 들어온 활동가,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활동하던 사회운동가, 노동조합운동의 간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전반에 걸쳐 노동운동을 하면서 커온 선진노동자들이었다. 광주학생운동 이후 “공장 속으로!” 투신하여 노동운동에 뛰어든 학생운동가들도 주요한 역할을 했다.

혁명적 노동조합은 사업장 별로 2-3인으로 이루어진 ‘반’이나 ‘공장그룹’ 같은 세포조직을 기초로 분회를 설치하고, 그 위에 공장의 분회를 관리.지도하는 공장위원회를 기반으로 지역 산업별 노동조합을 만든 뒤 전국을 아우르는 산업별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이후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조선공산당 재건의 기반이었고,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이익을 넘어서 정치투쟁으로 나가는 근거지였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운동과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핵심이었다.

총독부가 만든 부정확한 통계를 보더라도 1931~35년 사이 혁명적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검거된 건수가 70여 건이었으며, 1,759명이 감옥으로 잡혀갔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조직 결성 단계에 발각되거나, 선전 또는 파업투쟁을 통하여 조직 확대를 꾀하는 과정에서 탄압을 받아 와해 되었다. 내세웠던 목적을 끝내 달성하지 못하였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경험은 해방 후 변혁 주체의 형성과 조선노동조합평의회 같은 노동자 전국조직을 만들 수 있는 축적된 힘이 되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 이재유는 1903년 3월 함경남도 삼수군 별동면 선소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 12월 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학자금이 없어 학업을 계속하지는 못했으나 노동운동 사회주의 운동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이재유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이재유

1928년 7,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왔다. 1930년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옥중에서 자본론, 사적유물론 같은 사회과학을 학습하면서 메이데이 기념투쟁, 석공파업투쟁 같은 옥중투쟁을 벌였다. 이때 감옥에서 노동자운동가 김삼룡, 농민운동가 이성출, 학생운동가 이현상을 만났다.

1932년 12월 감옥에서 풀려난 이재유는 서울·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혁명적노동조합운동, 혁명적농민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재유 그룹은 1933년부터 1936년 사이에 경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공장에서 노동자를 끌어들여 연대하여 공산주의적으로 훈련하고, 화학.섬유.금속 등 산업별로 나누어 혁명적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동대문과 서울의 공업 지대에서 산별 노동조합을 만드는 운동을 했다. 또한 여주.양평지역에서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을 지도했으며,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반제(反제국주의)학생운동을 조직하였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경성트로이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경성트로이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1934년 1년 22일 밤 이재유는 다시 서대문서에 잡혀들어갔다. 서대문서는 정보를 캐려고 온갖 악랄한 고문을 자행했다. 이재유는 죽을 각오로 자기의 신념과 조직을 지켰다. 1934년 2월 하순 밤, 간수가 조는 틈을 타서 서대문서를 탈출하였다. 곧 체포되어 ’제1차 서대문서 탈출사건‘은 실패하였다. 1934년 4월 14일 이재유는 천황제를 싫어하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진 젊은 일인 경관의 도움으로 2차 탈출에 성공하였다. 서대문서를 탈출한 이재유는 경성제대 미야케 교수의 집으로 피신했다. 마루 밑을 파서 만든 지하실에서 40여일 동안 숨어 지냈다. 그 와중에도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비밀리에 자기 그룹과 접촉하였다. 1934년 5월 중순 정태식, 권영태, 미야케 교수가 체포되었다. 미야케가 탈출할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이재유는 무사히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1935년 1월 서울 한남동에서 동거하던 박진홍이 이재유의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에도 이재유의 행방을 숨겼다. 이재유와 이관술은 일제의 검거망을 벗어나 양주에서 2년 동안 숨어 살았다. 오막살이 한 채를 직접 세우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다. 야학을 열어 주민들에게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숨어서 잠수만 탄 것이 아니라 조선공산당경성준비그룹(1936.10)을 조직하고 기관지 <적기>를 발간하면서 일상활동과 혁명운동을 계속하였다.

이재유 이관술이 숨어 살던 창동리의 집과 밭
이재유 이관술이 숨어 살던 창동리의 집과 밭

1936년 12월 25일 오전 11시 40분 쯤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현재의 도봉구 창동) 부근 야산에서 이재유는 잠복 중이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는 이재유를 검거한 후 ‘이제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면서 자축연을 열었다.

이재유의 체포 사실을 알리는 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
이재유의 체포 사실을 알리는 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

이재유는 1938년 7월에 징역 6년형을 선고 받은 뒤 공주감옥에서 형을 다 마쳤다. 그러나 그 뒤에도 전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속 청주보호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일제 말기 많은 민족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 들이 전향하고 변절하였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일제의 앞잡이 밀정 노릇을 했다. 그런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이재유는 자신의 신념 양심, 혁명적 미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버텼다.

1944년 10월 26일 감옥에서도 옥중투쟁을 계속하던 이재유는 일제의 고문과 영양결핍으로 얻은 폐결핵, 각기병으로 41살 나이로 옥사하였다. 8.15 해방 10개월 전이었다. 이재유가 몇 년만 더 살았어도, 1945년 '8.15 해방' 이후 민족해방 노동해방의 새로운 사회, 통일된 사회를 이루려는 변혁운동에서 그가 맡은 몫은 누구보다 컸을 것이다. 이재유는 미 점령기에도 꼭 필요했던 혁명운동가였다. 먼저 떠난 아쉬움이 그만큼 더 크다. 관심이 있으면 이재유만큼은 ‘꼭’ 김경일 지음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푸른역사)을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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