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1946년 9월 총파업

  • 기사입력 2022.09.23 15:57
  • 최종수정 2022.09.23 19:07
  • 기자명 박준성(역사학연구소 연구원)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ㅇ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끝난 ‘해방공간’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 가능성을 열어준 희망의 공간이었다. 해방 공간에서 지금으로 치면 ‘임을 위한 행진곡’처럼 많이 불렸던 노래가 ‘해방의 노래’였다. 

당시 최고 수준의 작곡가이며 수많은 ‘민중가요’ ‘해방가요’를 작곡한 김순남이 작곡했다.   

김순남 작곡 [해방의 노래]
김순남 작곡 [해방의 노래]

   1.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2.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야

     놈들에게 빼앗겼든 토지와 공장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해방이 되자 되자 일본인 자본가들은 공장문을 닫고 시설을 처분해서 일본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기계를 부수고 원료를 팔거나 불지르기도 하였다. 노동자들은 ‘그동안 땀흘려 일한 공장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면서 공장을 접수하였다. 생산하지 않으면 자신이 굶어야 했으므로 노동자들 스스로 공장을 운영하면서 노동자자주관리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미국은 9월 8일 스스로 밝혔듯이 3.8선 이남을 점령한 점령군으로 이땅에 들어왔다. 조선 민중의 바램과 요구는 미군정하에서 하나하나 저지되고 와해 되었다. 노동자들의 요구를 관철하려면 조직된 힘이 필요했다.     

1945년 10월 26일부터 11월 4일까지 20만여 명의 조직 노동자들을 대표한 515명의 대의원들이 서울에 올라와 11월 5, 6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결성하였다. 전평에는 전국 212여만 명의 노동자들 가운데서 10% 정도인 21만여 명이 참가하였다. 1946년 2월에는 조합원이 57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창립 대회. 중앙이 전평 깃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창립 대회. 중앙이 전평 깃발

전평은 교통운수․금속․화학․철도․섬유․식료․광산․어업․통신․전기․토건․조선․목재․출판․해원․일반봉급자 등 16개의 전국적 산업별 단일노동조합과 각 산업도시에 하부조직인 산업별 지부, 그 아래 1천 194개의 분회가 속해 있었다. 서울․인천․대전․대구․부산․마산․군산․광주․목포․삼척․전주의 11개 도시에 지방평의회를 두고 그 지방의 산업별 지부를 총괄하도록 했다. 1947년 6월 에는 8개(경기, 충남, 충북, 전남, 전북, 경남, 경북, 강원)의 도평의회를 설치하고 지방평의회를 소속시켰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직체계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직체계도

1945년 11월 30일 평양에 결성된 전평 북조선총국은 1946년 4월 중순 이후 전평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북조선노동총동맹이 되었으며 5월 하순에 북조선직업총동맹으로 개편되어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전평은 자본과 국가에 의해 예속되지 않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노직이었다. 1945년 11월에서 1946년 3월까지의 전평 조직의 운영자금을 예로 들면 1천 600여만 원 가운데서 90%가 조합비와 노동자들의 의연금이었고 8.6%가 부채였다. 그에 비해 1946년 3월 10일 결성된 대한노총의 7월까지 운영자금 5천 7백여 만 원은 모두 이승만, 안재홍이 기부한 것이었고, 조합원과 노동자들이 낸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전평의 대의원과 노동자대회나 조합원 총회에서 선출하고 그들이 집행위원을 선출하고 집행위원회가 결정한 의사를 평조합원에게 지시한다는 점에서 민주집중제로 운영되었다. 전평이 목표로 내세운 일반행동강령을 요약하면 최저임금제, 8시간 노동제, 유급휴가제, 완전고용제, 사회보험제, 단체계약권,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파업의 자유, 노동자의 공장관리, 노농동맹, 인민공화국지지, 자주독립, 노동자계급이 국제적 연대이다.  

전평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 일제 식민지 시기 105일 동안 옥중단식투쟁 끝에 옥사한 이한빈을 소개한 전평 위원장 허성택의 1946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사가 실려 있다.
전평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 일제 식민지 시기 105일 동안 옥중단식투쟁 끝에 옥사한 이한빈을 소개한 전평 위원장 허성택의 1946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사가 실려 있다.

ㅇ 1946년 9월총파업

1946년 해방이 된지 1년이 지났다. 미군정 아래서 노동자 민중의 처지는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어려워졌다. 1946년의 물가는 1944년에 비해 92배 뛰었다. 1945년 5월에서 1946년 5월 사이 물가는 폭등했으나 임금은 물가에 비해 13분의 1밖에 안 올랐다. 1946년 1월에 쌀 한 말에 180원하던 것이 9월에는 1,200원으로 올랐다. 농민들은 일제 식민지시기에도 없던 하곡(보리쌀)공출까지 강요당하자 불만이 높아졌다. 9월 철도파업이 시작되기 전 서울시내에서 벌어진 24건의 파업에 노동자 3천 여 명이 참가하였으며, 농민들은 7월부터 하곡(보리쌀)수집반대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군정기 쌀공출
미군정기 쌀공출

1946년 8월 20일, 미군정 운수부는 '산업합리화'를 내세우며 철도 노동자 25%를 줄이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겠다고 발표하였다. 조합원이 4만여 명으로 전평에서도 가장 힘이 셌던 철도노조의 힘을 빼려는 의도였다. 9월 13일 철도국 서울공장 노동자 3천 7백여 명이 노동자대회를 열어 가족수당과 물가수당 인상, 일급제 반대, 식량배급 증대, 해고 절대 반대, 임금인상을 요구하였다. 미군정 운수부장 코넬슨은 "인도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사람은 강냉이라도 먹으니 행복하다"며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하였다. 

9월 23일 오전 0시 부산 철도노동자 7천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요구 조건은 1) 일급제 반대, 2)임금인상, 3)해고감원 절대반대, 4)급식제를 종전대로 실시, 5) 식량배급(노동자 4홉, 가족 3홉)이었다. 부산 발 상행선 모든 열차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그때 철도노조의 부산지부장은 뒷날 공화당 정책의장을 지낸 백남억이었다. 

24일에는 서울 철도노동자 14,949명이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잇따라 전국의 4만여 철도 노동자들이 모두 파업에 동참하였다. 전국의 철도가 멈추었다. 9월 25일 인쇄 출판 노동자들이 결집한 조선출판노동조합은 33개 노조분회에 파업을 지시하고 파업에 돌입하였다. 9월 26일에는 경전(京電)이 파업에 동참하였다. 전평은 9월 26일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쌀을 달라, 임금인상, 공장폐쇄와 해고 반대, 노동운동의 절대자유 보장,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가 석방과 지명수배 및 체포 철회" 등 8개 요구를 내걸었다. 철도노조의 투쟁에서 시작한 9월 총파업은 10월 초까지 금속, 체신, 섬유, 전기, 해운 같은 전평 산하 각 산별노조로 확대되었다.

미군정청 운수부장은 9월총파업을 "그것은 전쟁이었다. 우리는 적어도 전쟁으로 생각했었다"고 한다. 9월3 0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지휘아래 3천여 명의 경찰과 대한노총, 대한민주청년동맹, 서북계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에서 동원된 우익청년들이 용산철도기관구를 공격하였다. 철도노조 간부 16명과 조합원 1,200여 명이 검거되고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평 자체의 통계에 따르면 9월 총파업에 조합원 절대 인원 17만 3천 4백명이 참가하여 472건의 파업을 일으켰다. 이는 전평에서 분리된 북조선직업총동맹 소속을 뺀 전평 소속 전체분회의 64%, 전체 조합원의 55%에 해당한다(안태정,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한편 40% 이상의 조합원은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미군정과 자본이 저지른 해고와 테러 위협 같은 분열 책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45년 11월 전평이 결성된 이후 몇 개월 사이에 조합원들의 의식과 활동력 차이를 좁힐 수 있는 학습과 조직력이 부족했다. 

9월 총파업은 부산의 철도노동자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으킨 파업에 전평이 주도하여 총파업으로 발전하였다. 전평 산하 전체 산별 조직들이 통일된 힘으로 파업에 참가하지는 못했다. 출판 부문은 파업상황을 선전하고 마지막에 파업에 돌입하기로 하였는데, 9월 25일 바로 파업에 들어갔다. 10월 2일까지 신문 발행이 중단되었다. 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노동자들과 일반인에게 파업의 목적이나 요구, 파업의 전개과정을 알릴 기회를 스스로 막아버린 전술적 오류를 범했다.   

9월 총파업은 3.1운동 이후 가장 큰 민중항쟁인 ‘10월 인민항쟁’을 촉발시킨 도화선이 되었다. 9월 총파업에서 노동자들은 ‘쌀을 달라’며 식량 배급 확대를 요구하였다. 10월 항쟁에서 농민들은 ‘공출반대’를 외쳤다. 노동자 농민들 사이에 이해관계 대립되었다. 전평이나 정치조직은 양쪽의 이해관계를 조화시키지 못했다. 노농연대를 확대시킬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1946년 9월 총파업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속과 해고는 물론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참가하였다. 미군정과 자본이 만들어 놓은 비인간적 상황을 벗어나려 했다. 노동자 대중이 생존권과 생활권을 확보하여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는 의지로 나선 투쟁이었다. 9월 총파업은 당과 대중조직, 대중조직과 노동자 대중, 노동자와 민중의 관계를 가늠해 보는 잣대가 되었다.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생활권을 가로막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압살한 세력이 누구였는가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한국전쟁 이후 전평과 노동자 파업투쟁은 오래 동안 역사의 깊은 갈피 속에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골짜기에서 흐르던 물줄기가 끊겼다고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것은 아니다. 바닥 밑으로 흐르던 물줄기는 어디선가 다시 겉으로 드러난다. 1987년 7.8.9노동자 대투쟁을 경험한 노동자들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자 전국 조직 건설을 준비하면서 역사를 돌아봤다. 전평은 새로운 노동자 전국조직이 딛고 건너갈 디딤돌이 되었다. ‘해방공간’의 선배 노동자들의 전국 조직과 투쟁의 경험이 없었다면 우리는 외국의 노동운동사만 뒤적이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대회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대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