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기고] 유해한 공기와 헤어질 결심 - 민주노총 평등수칙 발표 즈음에

  • 기사입력 2022.10.18 13:23
  • 최종수정 2022.10.18 15:13
  • 기자명 손지은 전교조 부위원장

우리가 일하는 곳마다 ‘먼지’가 있다.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자주 청소하지 않으면 어느샌가 켜켜이 쌓여 그 공간 안에 있는 모두의 건강을 해칠 수 있는 ‘먼지’. 이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넘어 일상적으로 만연해 있는 미세하게 생겨나는 차별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이것을 먼지차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은 10월 17일 <민주노총 평등수칙>(이하 평등수칙)을 발표했다. 평등수칙은 민주노총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구성원의 평등하고 안전한 활동공간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실천이다. 노동 현장에서 각각의 노동자가 갖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존중받으며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일터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이다. 그야말로 ‘먼지’와 헤어질 결심.

평등수칙은 절박함 속에서 나왔다. 17개의 구체적인 행동조항으로 이루어진 평등수칙은 규율적 강제력이 없다. 위반하는 행동을 했을 때 징계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죽하면 우리 안의 ‘약속’을 제정했을까. 어쩌면 평등수칙은 이거라도 없다면 일상에서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실제로 사례는 넘쳐난다. 동료/동지가 활동 공간에서 차별적인 말이나 ‘선 넘는’ 행동을 자주 하는데 이를 금지하는 규정이 없어서 그만하라고 말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말을 해도 개인적 차원에서 할 수밖에 없어서 쉽게 무시당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차원의 평등수칙을 발표하기 이전부터 몇몇 가맹조직은 각자의 조직에서 이미 평등의 약속을 실천하고 있었다. 건설산업연맹에서는 2019년, 현장이나 조직 내에서 여성 노동자를 ‘아줌마’, ‘아가씨’, ‘어이’, ‘이모’, ‘여사님’ 등으로 부르는 차별적 호칭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이름 부르기 캠페인’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더 이상 아줌마, 아가씨, 이모님이 아니라 ‘000씨’, ‘000목수님’, ‘00반장님’ 등 동료로서 부르는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는 비단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김씨’, ‘이씨’, ‘어이’라고 부르면서 하대하던 건설현장 전체의 이름 부르기로 발전해가고 있다.

전교조에서는 2021년 3월 8일 세계여성의날 이후 ‘평등하고 안전한 회의/연수/행사를 위한 우리의 약속’을 만들었다. 성평등특별위원회에서는 이 약속문은 현수막으로 제작하여 본부와 17개 시도지부 사무실에 게시해놓았다. 대의원대회나 조직 내 주요 의결단위 회의, 각종 연수 때마다 자료집 앞장에 첨부한다. 회의나 행사에 앞서 조항별로 한 명씩 돌아가며 낭독하거나 잠깐 혼자 읽는 시간을 갖는다.

약속문이나 평등수칙이나 어찌 보면 종이 문서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 종이 한 장이 효과가 있을까 우려도 했지만 생각보다 언어의 힘은 강력하다. 고성을 지르거나 위압적인 태도로 타인을 억누르는 발화를 하지 않도록 서로가 감시하고 조심하는 분위기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성적인 농담을 함부로 하지 않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누군가 성희롱 발언을 하면 “그거, 약속문 있잖아 약속문!”이라며 간단하게 제지하기도 한다.

자료집 한켠이 너무나 중요하다. 현수막 한 장, 행사 전 단 몇 분의 시간이 조직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요즘 시대에 이것만은 넘지 말아야 한다고 각자 머릿속에 알고 있던 ‘선’들이 조직의 약속으로 함께 읽혀지는 순간 깰 수 없는 규칙이 된다.

민주노총 평등수칙은 지난 8월 18일 중앙집행위원회(이하 중집)에서 채택했다. 대외적으로 보면 한국 사회 거대 노동조합연맹 차원에서 최초로 평등이라는 대원칙을 공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수칙을 채택한 중집 구성원이 반응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전체 조합원 수인 113만 명에 비하면 중앙 의결권을 가진 중집 조합원의 수는 미미하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다. 조직의 주요한 사업 대다수를 결정하는 리더의 자리에 있는 만큼 그들이 채택하는 사항과 그들이 하는 말과 그들이 하는 행동은 전 조직에 울림을 주고 메아리로 돌아오게 할 파급력이 있다. ‘중앙’이 결의하고 행동할 때 비로소 노동조합과 현장에 있는 조합원들은 변화하고 있는 평등한 문화를 피부로 감지할 것이다. 페미니스트 리더가 조합원에게 ‘먼지’와 헤어질 결심을 안긴다.

손지은 전교조 부위원장
손지은 전교조 부위원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